[수필의 향기] 할아버지와 원두막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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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치 영감, 원두막 주인이다. 복숭아가 익어가면 원두막보다 영감부터 떠오른다. 근방에선 모르는 이가 없다. 얼굴은 썩은 복숭아처럼 험악한데, 힘까지 셌다. 우린 영감을 보면 일부러 쩔쩔매고 달아나기 바빴다. ‘도끼’를 우리 마을에서 ‘도치’라고 하는데, 영감은 ‘또치, 또치’라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몇 해 전, 동네 아이 몇이 영감네 복숭아 서리를 하다 잡혀서 혼쭐이 났다. 게다가 값도 몇 배 변상까지 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그 집 복숭아를 넘보지 않는다. 하지만, 나날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복숭아, 그 선홍빛 복숭아의 유혹을 우린 어찌할 수 없었다.
마음껏 먹는 방법은 서리밖에 없었다. 우린 주린 창자를 복숭아로 채우기로 결심하고, 선발대를 원두막에 침투시켰다. 깨철이는 복숭아를 사러 간 사람을 따라가서 가장 안전한 곳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디데이를 기다렸다.
다음 날, 마을 행사로 또치 영감이 거나하게 취해 귀가했다. 우린 즉시, 출동했다. 때마침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잘 훈련된 병사처럼, 한 줄로 포복해서 산기슭 복숭아밭 울타리를 하나둘, 무사히 넘었다.
저물녘의 원두막은 한 폭 그림이다. 거기엔 언제나 사람이 모였고, 이야기와 웃음이 넘쳤으며, 모깃불 연기가 어둠을 밀어내는 곳이었다. 농사일에 바쁜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가끔 원두막에 쉬었다 갔다. 복숭아는 어느 나무에 몇 개가 열렸는지 꿰뚫고 있는 또치 영감의 사랑으로 자랐고, 아저씨 목에 막걸리 넘어가는 소리에 컸으며, 아주머니가 뿌려주는 깔깔깔 웃음소리에 부쩍부쩍 익어갔다. 만약 그림을 그린다면 밀레의 ‘만종’이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테제 호수’처럼, 나는 원두막을 배경으로 한 시골 풍경, 우리 마을 원두막을 멋지게 그리고 싶다.
복숭아를 모두 판, 빈 원두막은 아이들 차지였다. 우린 그 원두막을 놀이터 삼아 낮잠도 자고 전쟁놀이도 했다. 그날 저녁, 우린 무사히 복숭아나무에 도착했다. 저 멀리 원두막이 보였고 또치 영감도 잠들어 있었다. 우린 각자, 서둘러 복숭아를 양손 가득 땄다. 그리고 오던 길로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깨철이가 복숭아를 우적우적 베어먹으며 오고 있었다. 나도 킥킥거리며 복숭아를 입에 집어넣었다. 달콤한 향기와 과즙이 막 입속으로 번질 때였다.
땡그랑, 땡그랑! 요란한 깡통 소리에 놀라 황급히 원두막을 돌아보니, 언제 잠에서 깼는지 또치 영감이 커다란 쇠스랑을 들고 쏜살같이 쫓아오고 있었다. 또치 영감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은 곳은 빈 깡통으로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았는지를 몰랐다. 우린 꼼짝없이 잡히고서야 깡통을 밟은 친구를 원망했다.
붙잡힌 포로들은 사색이 되어 영감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영감은 술이 덜 깼던지 피식피식 웃으면서 “넌, 명주 둘째 손주이고, 또 너는 춘양댁 막내아들이구나.”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신분을 확인했다. 순전히 막걸리 덕분이었다. 우린 두고두고 할아버지보다 막걸리에 감사했다. 그 엄하던 또치 할아버지가 우리 손에 든 복숭아는 보고, 이미 따버렸으니, 맛있게들 먹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면서 너그럽게 용서해 준 것이다.
훗날에야 알았다. 또치 할아버지의 전설은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복숭아 서리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꾸며낸 이야기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치 할아버지는 소문과 달리 실제로는 아주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셨다. 깡통도 멧돼지를 쫓기 위해 설치한 것이단다.
우린 원두막을 통해 할아버지의 선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배려도 알고 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난 이후,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시는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는 마법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또치 할아버지 복숭아는 매년 탐스럽게 잘 자랐다.
이젠 원두막 대신 농막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복숭아를 보면 제일 먼저 또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그 옛날 원두막이 그립다. 싱글벙글 선하게 살았던 그 시대 할아버지들도 보고 싶다.
가난했지만 서로를 생각했던 사랑, 그분들 덕택으로 가난을 좋은 기억으로 새긴 것 같다. 복숭아처럼 둥글게 둥글게….
마음껏 먹는 방법은 서리밖에 없었다. 우린 주린 창자를 복숭아로 채우기로 결심하고, 선발대를 원두막에 침투시켰다. 깨철이는 복숭아를 사러 간 사람을 따라가서 가장 안전한 곳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디데이를 기다렸다.
다음 날, 마을 행사로 또치 영감이 거나하게 취해 귀가했다. 우린 즉시, 출동했다. 때마침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잘 훈련된 병사처럼, 한 줄로 포복해서 산기슭 복숭아밭 울타리를 하나둘, 무사히 넘었다.
복숭아를 모두 판, 빈 원두막은 아이들 차지였다. 우린 그 원두막을 놀이터 삼아 낮잠도 자고 전쟁놀이도 했다. 그날 저녁, 우린 무사히 복숭아나무에 도착했다. 저 멀리 원두막이 보였고 또치 영감도 잠들어 있었다. 우린 각자, 서둘러 복숭아를 양손 가득 땄다. 그리고 오던 길로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깨철이가 복숭아를 우적우적 베어먹으며 오고 있었다. 나도 킥킥거리며 복숭아를 입에 집어넣었다. 달콤한 향기와 과즙이 막 입속으로 번질 때였다.
땡그랑, 땡그랑! 요란한 깡통 소리에 놀라 황급히 원두막을 돌아보니, 언제 잠에서 깼는지 또치 영감이 커다란 쇠스랑을 들고 쏜살같이 쫓아오고 있었다. 또치 영감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은 곳은 빈 깡통으로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았는지를 몰랐다. 우린 꼼짝없이 잡히고서야 깡통을 밟은 친구를 원망했다.
붙잡힌 포로들은 사색이 되어 영감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영감은 술이 덜 깼던지 피식피식 웃으면서 “넌, 명주 둘째 손주이고, 또 너는 춘양댁 막내아들이구나.”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신분을 확인했다. 순전히 막걸리 덕분이었다. 우린 두고두고 할아버지보다 막걸리에 감사했다. 그 엄하던 또치 할아버지가 우리 손에 든 복숭아는 보고, 이미 따버렸으니, 맛있게들 먹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면서 너그럽게 용서해 준 것이다.
훗날에야 알았다. 또치 할아버지의 전설은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복숭아 서리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꾸며낸 이야기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치 할아버지는 소문과 달리 실제로는 아주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셨다. 깡통도 멧돼지를 쫓기 위해 설치한 것이단다.
우린 원두막을 통해 할아버지의 선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배려도 알고 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난 이후,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시는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는 마법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또치 할아버지 복숭아는 매년 탐스럽게 잘 자랐다.
이젠 원두막 대신 농막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복숭아를 보면 제일 먼저 또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그 옛날 원두막이 그립다. 싱글벙글 선하게 살았던 그 시대 할아버지들도 보고 싶다.
가난했지만 서로를 생각했던 사랑, 그분들 덕택으로 가난을 좋은 기억으로 새긴 것 같다. 복숭아처럼 둥글게 둥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