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딱지 편지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전체메뉴
[수필의 향기] 딱지 편지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5년 06월 16일(월) 00:00
친구가 찾아왔다. 투표하라고 재촉하던 넉살 좋은 친구, 넉구다. 선거 결과가 녀석 뜻대로 되었는지 으쓱으쓱 기분이 좋다. 정의와 가치에 대해 깨어 있는 사람의 승리라며 그들을 치켜세운다.

녀석과는 불알친구다. 뭐 하나 감출 것도 없이 속내를 드러내놓는 사이다. 그런 그를 보면 문득 옛적 딱지가 생각나서 비시시 웃음부터 나온다.

윗집 사는 넉구, 그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뻤다. 항상 싱글벙글 성격도 좋았다. 허구한 날 노는 우리와는 격이 달랐다. 넉구를 보러 가면 누나는 단정히 책상에 앉아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누나를 나 말고도 석태와 우석이 형이 좋아했다.

하지만 누나는 나에게 특별했다. 혹여 윗단추라도 풀리면 바짝 다가와서 단추를 꼭 잠가주었다.

“에고 우리 착한 동생, 다 큰 사람이 감기 걸리겠네”

그녀의 손이 내 가슴에 다가오면 가슴이 뛰었고, 그녀의 숨소리를 느낄 때는 정신이 아득했다. 내가 착하다는 말은 나를 좋아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콜록거릴 때는 이마를 손으로 꼬옥 짚어보곤 빨리 약국에 가라며 걱정을 해주었다. 나는 누나 손길이 떠나지 않고 오래오래 머물도록 일부러 더 크게 콜록콜록 콜록거렸다.

언젠가부터 편지를 썼다. 윗집에 도착할 편지를 멀리 우체국까지 가서 붙이고 오면 기분이 참 묘했다.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내 포부와 결혼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편지를 쓰고 며칠 후, 넉구 집에 가면 누나는 여전히 그 단정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답장이 오거나 누나가 편지 이야길 꺼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넉구를 핑계로 그 집에 갔고, 일부러 누나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때마다 누나는 답장 대신 나를 보고, 공부 잘한다며 칭찬해 주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사람 만나야지!”

그때, 난 누나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사람은 누나밖에 없었다. 그날도 넉구와 딱지를 쳤다. 그날따라 유난히 딱지가 잘 넘어갔다. 딱지를 다 잃은 넉구는 나더러 기다리라고 하더니 와당 탕탕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새 딱지를 들고나왔다. 크고 빳빳한 딱지였다. 그 딱지를 보자 여느 때보다 그 딱지를 꼭 따고 싶었다.

땅에 착 달라붙은 딱지, 왼발을 딱지에 대고 오른손으로 힘껏 내리치면 바람 방향이 꺾이면서 딱지가 넘어간다.

근데 딱지를 보다가 낯익은 글씨가 보였다. 그건 내 글씨였다. 다시 봐도 내가 누나에게 쓴 편지였다. 넉구는 내 편지로 지금 딱지를 만들어 온 것이다.

…누난 신부, 난 신랑…

딱지 글씨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행히 넉구는 그게 편지라는 것도, 그리고 내가 쓴 편지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저 딱지를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편지가 만천하에 공개될지 모른다. 그러면 내 체면은 물론 누나 체면은 또 어떻겠는가.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며 나를 비웃는 녀석들이 떠올랐다. 손에 땀이 송골송골 솟아났다. 내 차례가 오자 힘껏 딱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그 딱지를 내리쳤다.

어느 마을에나 여신이 있었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닮은 누나, 지금 누나는 평범하게 살고 있다. 석태와 우석이 형도 잘 산다. 딱지 한 장에도 애면글면했던 때, 단추를 잠가주고 이마를 만져주던 손길 하나에도 조마조마 가슴 떨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꼬집거나 손 방망이를 쳐도 감각이 없다.

누가 쏘지도 않았는데, 홀로 맞은 화살, 누구나 이런 화살을 쏘기도 하고 맞으며 자란다. 짝사랑은 모두 거기서 거기, 늘 빗나간다. 그럴지라도 그 성장통이 훗날 참된 사랑, 참된 인생의 길라잡이가 된다.

넉구와 헤어졌다. 그는 가면서까지 지역과 종교, 이념으로 갈라치는 세력과 맹목적으로 그들을 추종하는 노예근성은 이 시대에 맞지 않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딱지, 내 사랑이 담긴 유년의 추억 한 장, 좋은 기억으로 남은 누나에게 편지 대신 고마운 딱지 한 장을 접는다.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