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세계문학중심도시로] 자연과 벗하며 시문…의로움의 ‘선비정신’ 광주문학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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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세계문학중심도시로] 자연과 벗하며 시문…의로움의 ‘선비정신’ 광주문학 뿌리
[산하에 꽃핀 누정문학]
누정, 남도만의 문학·철학·역사 배어
과거·현재·미래로 접속할 수 있는 통로
하서 김인후·고봉 기대승·제봉 고경명…
옛 문사들의 글귀 속 학문과 감성 충만
취가정, 충장공 김덕령 의와 충 깃들어
2025년 04월 07일(월) 08:00
광주시 북구 충효동 ‘환벽당’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발견은 있다. 발견은 기존에 있던 것을 밝혀낸다는 데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이 투영된다.

오늘 보았던 풍경은 내일의 풍경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미세한 차이는 큰 변화를 견인한다. 차이가 없더라도 우리들 사유에 일말의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이된다.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과거 그리고 어제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도 기실 많은 차이를 내재한다. 반복이 아닌 다르게 바라보기 차원은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기제다.

그러한 시각에서 삶을 바라보면 내일은 오늘의 순간들이 모인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세대 없이는 내일의 세대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선조들이 없었다면 오늘 세대도 존립할 수 없다.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유산을 이어받았기에 오늘의 세대는 빛나는 문화를 꽃피웠으며 내일의 세대 또한 오늘을 토대로 그들만의 문화를 온누리에 퍼뜨릴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매개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문화유산을 꼽으라면 누정을 빼놓을 수 없다. 언덕과 들판, 산자락에 자리한 누정과 정자에는 과거의 빛나는 문화가 응결돼 있다. 오래된 미래와 접속할 수 있는 통로이자 머나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광주시 남구 칠석동 ‘부용정’
실로 광주에는 많은 누정이 있다. 얼핏 그렇고 그런 유사한 누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보면 거기에는 남도만의 문학과 철학, 역사, 사유가 오롯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어진 연대, 철학과 삶은 다를지언정 그 저변에는 문학과 풍류, 교유와 같은 다채로운 정신과 실천의 영역이 연계돼 있다. 향약이 처음 시행된 남구 칠석동의 부용정을 비롯해 ‘제일호산’이라 부를 만큼 영산강변 정취가

아름다운 풍영정,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이어온 양과동정, 사촌 김윤제의 푸른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오는 환벽당, 충장공 김덕령의 붉은 충절이 깃든 취가정 등이 그러한 예다.

오늘의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문화수도’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데는 광주의 문화자산이 그만큼 풍요롭고 토대가 굳건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것의 기저에는 누정문학, 정자문학으로 대변되는 선조들의 수준 높은 시문과 정신이 드리워져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트렌드와, 화려함으로 치장한 일부 시각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깊이와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함초롬히 앉은 정자의 자태는 단아하기 그지없다.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오늘에까지 이어져 온 누정은 저마다 옛 문사들의 고아한 글들을 품고 있다. 산자수명에 대한 경외와 ‘청산에 살어리랏다’로 대변되는 자연에 대한 동경은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와 평안을 선사한다.

광주시 북구 충효동 ‘풍암정’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접하는 곳에 자리한 풍영정은 이름만큼이나 풍광이 뛰어나다. 이곳 출신 칠계(漆溪) 김언거 선생이 홍문관교리, 중앙의 승무원 판교 등의 벼슬을 마치고 낙향해 지었다.

풍영(風詠)은 “시가(詩歌)를 읊조린다”는 의미다. 시와 노래를 즐기는 공간이다. ‘논어’에서 유래한 말로 공자가 제자들에 소원을 묻자 증점이 대답한 데서 나왔다.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무우(無雩)에서 바람을 쐬면서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습니다/풍우영귀(風雩詠歸)”라고 답한 것이 유래됐다 한다. 그 말은 점차 ‘자연과 벗하며 시를 읊다’라는 말로 전이된다.

정내에 들어서면 대유(大儒)들의 다양한 시문을 볼 수 있다. 하서 김인후 외에도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등 조선 선비들의 글귀는 오늘의 시대에도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각각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은 풍영정의 역사적, 학술적 위상을 여실히 증명하는데 무엇보다 김언거의 학문에 대한 열망, 시문에 대한 감성을 보여준다.

무등산 자락에 살뜰히 앉은 환벽당(環碧堂)은 ‘푸르름을 사방에 두른’ 정자라는 뜻이다. 무등산 줄기 담양과의 인접한 호젓한 산 언덕에 자리사하며 촌(沙村) 김윤제가 퇴휴하고 고향인 충효동 무등산 자락에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뛰어난 문사들인 정철, 임억령, 김인후, 백광훈 등이 교류를 이어갔다.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일동삼승’으로 불릴 만큼 풍광과 역사, 인문 등 어느 것도 뒤지지 않는다.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영산강이 접하는 곳에 자리한 풍영정은 이름만큼이나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풍영정 앞을 흐르는 영산강
고경명은 ‘유서석록’에서 ‘환벽’이라는 명칭을 영천자 신잠(申潛)이 붙여 편액했다고 전한다. 아울러 김윤제가 거처했던 곳으로 벽간당(碧澗堂)이라는 표기도 볼 수 있다. 정철이 지은 ‘제벽간당’(題碧澗堂)이라는 작품의 머리 부분(小序)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촌옹의 조그만 초려가 쌍계 위 서석 아래에 있는데 하루는 옹이 오두막 북쪽 벽에 벽간당이라 써 붙였다”라는 글귀가 그것이다. 이것으로 미뤄보면 벽간당 당호는 김윤제가 썼으며 환벽당은 신잠이 편액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정에서는 나라사랑의 단심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취가정. 이곳은 충장공 김덕령의 의와 충이 오롯이 깃든 역사적인 공간이다. 광주를 대표하는 거리 ‘충장로’ 명칭이 충장공으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안다. 그러나 거기에 깃든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정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저 광주에는 충장로가 있고, 광주에는 임란 때의 의병 충장공 김덕령이 있다는 정도만 아는 게 대부분이다.

취가정은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편에 있다. 작은 꼬막처럼 앉은 정자는 수수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묻어난다. 정자로 올라가는 언덕으로 칸칸이 돌계단이 놓여 있어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의 시문을 읽다 보면 어지러웠던 오늘날의 정치 현실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누가 들을 건가/ 꽃과 달을 즐겨함도 나의 소원 아니었고/ 높은 공을 세우려는 것도 바람 아니었네/ 공을 세운 그 업적도 구름처럼 사라지고/ 꽃과 달을 즐기는 것도 부질없는 허사로다/ 술에 취해 부른 노래 어느 누가 알리요/ 긴 칼 들고 일어서 임금께 보은하려는 것을”

광주 향약의 시원지이자 시행처인 부용정에도 선비들의 다양한 글이 걸려 있다. 김문발은 여말선초의 선비로, 만년인 1416년 지역 인재를 기르고 향촌 규율을 바로잡기 위해 부용정을 지었다

김문발 사후 150여 년이 지난 즈음 일련의 선비들이 부용정을 찾았다. 당시 광주 목사인 송천 양응정을 비롯해 삼십 대의 제봉 고경명, 명암 김형 등이 그들이다. 또한 칠석마을 일원의 광산김씨 집안사람들도 참석했는데 이들은 안부를 물으며 시운을 떼었다.

번잡한 도시와 복잡한 일상에 매여 있다 보면 우리 옛것의 문화를 잃어버리기 일쑤다. 더욱이 정신문화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소홀히 대하기 쉽다.

이처럼 누정에는 충과 효 등 올곧은 정신이 정치한 시문과 연계돼 있다. 오늘날 광주문학의 상당부분이 선비정신으로 대변되는 누정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로움, 풍류, 교유 같은 다양한 의미의 문학정신은 오늘의 광주문학을 살찌웠고 내일의 광주문학을 견인할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손색이 없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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