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세계문학중심도시로] 한국 현대시 주춧돌 ‘시문학’ 창간…순수 지향했던 민족시인
[민족의식과 순수서정의 박용철 시인]
1904년 소촌동 대지주 장남으로 출생
중학교 재학 당시 친구들과 지하신문 발행
日 유학시절 강진 유학생 김영랑과 교유
귀국 후 동료들과 고향서 문학에 정진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등 게재
일제 강점기 억압 속 자주 독립 의지 담아
1904년 소촌동 대지주 장남으로 출생
중학교 재학 당시 친구들과 지하신문 발행
日 유학시절 강진 유학생 김영랑과 교유
귀국 후 동료들과 고향서 문학에 정진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등 게재
일제 강점기 억압 속 자주 독립 의지 담아
![]()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에는 시인의 문학세계와 시혼이 응결돼 있다. |
가끔 삶이 해독 불가능한 지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방향, 어느 길로 들어서야할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삶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세상의 일이랴. 요즘처럼 생각들이 첨예하게 갈리는 지점에선 더더욱 그렇다. 도통 속내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그저 그런 예삿말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역사는 전진한다. 물줄기가 굽이굽이 산자락을 에둘러가는 것 같아도 끝내 너른 대해를 향해 간다. 수레바퀴가 진창에 막혀 옴짝달싹 못하는 때도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용아(龍兒)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를 되뇌었던 시절이 있다. 그 ‘떠나가는 배’에 승선하면 쓸쓸하고 매몰찬 세상의 정글로부터 잠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여정이 열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후일에야 알았다. 기대와 설렘의 이면에는 늘 불안과 고뇌가 자리한다는 것을. 기항지 없이 떠나가는 배는 거센 풍파에 휩쓸리며 가혹한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생을 구원해 줄 판타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용아(龍兒) 생가를 향해 가는 길, 이런 저런 생각들이 얽혀든다. 식민지 치하의 시인 또한 억압이 없는 미지의 세계를 꿈꿨구나. 그러나 그의 발길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을 거였다. 수탈과 압제에 눌린 조국의 현실을 시인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남겨진 것들에 대한, 애정하는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애닮음이 그의 시에 곡진하게 남아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미세먼지가 자욱하다. 봄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황사다. 봄은 봄이련만 세상은 온통 뿌옇다. 황사에 가려진 너머의 세상은 비의(秘義)로 가득하다. 장막에 가려진 저편의 세상은 저잣거리 범인(凡人)들은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노란 먼지가 씻겨 내려가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날 텐데, 그러나 비는 오지 않고 바람도 잔잔하다.
용아 생가는 광산구 소촌동에 있다. 예전과 다르게 생가 주위로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시간이 흐르면 풍경이 변하는 거야 인지상정이지만 생각보다 빠른 느낌이다. 인근 큰 도로 너머로 수십 개 동의 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생가는 초가의 형태다. 초가와 본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고 뒤편으로 사당이 있다. 도심에서 정겨운 초가를 본다는 것이 적잖이 반갑다. 지붕을 새로 이어서인지 이발을 한 말쑥한 사내의 느낌이 배어나온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시문학’이라는 순수문학 깃발을 올렸던 용아의 시혼이 깃든 곳이라 생각하니 옷깃이 여며진다.
곽경숙 해설사는 “2주 전에 새로 지붕을 이어 봄단장을 했다”며 “방문객들이 말쑥하게 정비뒨 모습을 보고 좋아들 하신다”고 전했다.
박용철은 1904년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문신 눌재 박상의 후손이다. 그가 태어난 소촌동은 예전에는 솥머리라고 불리던 지역이다. 어린 시절 용아의 집안은 부유했다. 천석꾼 대지주였던 집안의 4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를 졸업하고 휘문의숙에 입학한 그는 얼마 후 배재고보로 전학을 간다. 공부를 잘했던 용아는 수학은 늘 톱이었다. 민족의식이 각별했던 그는 친구들과 ‘목탁’이라는 지하신문을 발간하기도 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친구들이 구속되고 3·1운동도 실패로 끝나자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자퇴를 한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도쿄외국어대(현 동경외국어대) 독문과에 입학한다. 일본에서 박용철은 강진에서 유학 온 문청 김영랑과 교유를 한다. 후일 김영랑 등과 ‘시문학’을 창간하고 시문학파라는 유파를 형성하게 된다.
용아는 수학 뿐 아니라 영어와 독일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만큼 어학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한다. 지진 여파로 조선인 수천 명이 살해당하는 끔직한 참극이 벌어진 것.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한 용아는 귀국을 하고, 이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편입한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위당(爲堂) 정인보가 있었다. 정인보는 용아의 문재를 알아보고 ‘장래가 촉망된다’며 격려를 한다. 연희전문에서 배움을 이어가던 박용철은 잠시 학업을 멈추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한때 독일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용아는 유폐하듯 집안에 틀어박혀 시작에 몰두한다. 또한 이 기간 김영랑을 비롯해 다른 문우들과 지속적인 교유를 하며 문학에 정진한다. 마침내 동인지 ‘시문학’ 창간호가 1930년 3월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창간호에는 김영랑의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 정지용의 ‘이른 봄 아침’, 이하윤의 ‘물레방아’, 정지용의 ‘이른 봄 아침’ 등이 실렸다. 박용철은 ‘떠나가는 배’, ‘이대로가랴만은’, ‘싸늘한 이마’,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게재했다.
박용철의 문학인생을 톺아보며 초가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본다. 토담 아래 고샅처럼 이어진 흙길을 밟으며 명작 ‘떠나가는 배’ 를 읊조린다. 시 속의 화자에게 떠남은 번민과 갈등을 환기하는 기제였을 것이다. 거기엔 일제 치하의 억압적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의 내밀한 바람이 드리워져 있다. 한편으론 눈에 밟히는 고향 산천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는 아릿한 마음도 담겨 있다. 길항의 틈바구니에서 화자는 못내 쓸쓸하고 아팠을 거다.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ㅉㅗㅈ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만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떠나가는 배’) 전문
이 봄에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싶다. 여전히 세상은 불의하며 삶은 빈한하다. 시절은 하수상한데 결핍은 가혹하게 일상을 옥죈다. 발길 닿는 데로 떠나는 것만이 능사일 것만 같다. 박용철이 시를 매개로 추구했던 세상과 오늘의 세상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일제 치하 시인이 꿈꾸었던 독립, 오늘의 우리가 꿈꾸는 강고한 자본과 불의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는 결코 다르지 않을 거였다.
노란 초가 뒤로 무성히 자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정원은 자연 그대로의 생명을 피워낸다. 나붓나붓 피어난 매화꽃에서 잔향이 밀려온다. 안채 어딘가에서 안경을 낀 사색에 잠긴 시인이 나올 것만 같다.
문학에 진심이었던 박용철은 ‘시문학’ 창간호의 ‘후기’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는 ‘문학은 그 민족의 국어를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민족의식과 순수 서정을 견지했던 용아의 시정신은 오늘날 광주문학을 있게 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맺힘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는 지나가는 걸음에 슬쩍 읽어치우기를 바라지 못하고 우리의 시는 열 번 스무 번 되씹어 읽고 외워지기를 바랄 뿐 가슴에 느낌이 있을 때 절로 읊어 나오고 느낌이 일어나야만 한다. 한말로 우리의 시는 외워지기를 구한다. 이것이 오직 하나 우리의 오만한 선언이다(중략) 한민족의 언어가 발달의 어느 정도에 이르면 국어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문학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국어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용아(龍兒)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를 되뇌었던 시절이 있다. 그 ‘떠나가는 배’에 승선하면 쓸쓸하고 매몰찬 세상의 정글로부터 잠시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여정이 열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후일에야 알았다. 기대와 설렘의 이면에는 늘 불안과 고뇌가 자리한다는 것을. 기항지 없이 떠나가는 배는 거센 풍파에 휩쓸리며 가혹한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생을 구원해 줄 판타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 생가를 알리는 표지판. |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미세먼지가 자욱하다. 봄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황사다. 봄은 봄이련만 세상은 온통 뿌옇다. 황사에 가려진 너머의 세상은 비의(秘義)로 가득하다. 장막에 가려진 저편의 세상은 저잣거리 범인(凡人)들은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노란 먼지가 씻겨 내려가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날 텐데, 그러나 비는 오지 않고 바람도 잔잔하다.
용아 생가는 광산구 소촌동에 있다. 예전과 다르게 생가 주위로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시간이 흐르면 풍경이 변하는 거야 인지상정이지만 생각보다 빠른 느낌이다. 인근 큰 도로 너머로 수십 개 동의 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생가는 초가의 형태다. 초가와 본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고 뒤편으로 사당이 있다. 도심에서 정겨운 초가를 본다는 것이 적잖이 반갑다. 지붕을 새로 이어서인지 이발을 한 말쑥한 사내의 느낌이 배어나온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시문학’이라는 순수문학 깃발을 올렸던 용아의 시혼이 깃든 곳이라 생각하니 옷깃이 여며진다.
곽경숙 해설사는 “2주 전에 새로 지붕을 이어 봄단장을 했다”며 “방문객들이 말쑥하게 정비뒨 모습을 보고 좋아들 하신다”고 전했다.
박용철은 1904년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문신 눌재 박상의 후손이다. 그가 태어난 소촌동은 예전에는 솥머리라고 불리던 지역이다. 어린 시절 용아의 집안은 부유했다. 천석꾼 대지주였던 집안의 4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를 졸업하고 휘문의숙에 입학한 그는 얼마 후 배재고보로 전학을 간다. 공부를 잘했던 용아는 수학은 늘 톱이었다. 민족의식이 각별했던 그는 친구들과 ‘목탁’이라는 지하신문을 발간하기도 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친구들이 구속되고 3·1운동도 실패로 끝나자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자퇴를 한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도쿄외국어대(현 동경외국어대) 독문과에 입학한다. 일본에서 박용철은 강진에서 유학 온 문청 김영랑과 교유를 한다. 후일 김영랑 등과 ‘시문학’을 창간하고 시문학파라는 유파를 형성하게 된다.
![]() 송정공원에 있는 ‘떠나가는 배’ 시비. |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한 용아는 귀국을 하고, 이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편입한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위당(爲堂) 정인보가 있었다. 정인보는 용아의 문재를 알아보고 ‘장래가 촉망된다’며 격려를 한다. 연희전문에서 배움을 이어가던 박용철은 잠시 학업을 멈추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한때 독일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용아는 유폐하듯 집안에 틀어박혀 시작에 몰두한다. 또한 이 기간 김영랑을 비롯해 다른 문우들과 지속적인 교유를 하며 문학에 정진한다. 마침내 동인지 ‘시문학’ 창간호가 1930년 3월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창간호에는 김영랑의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 정지용의 ‘이른 봄 아침’, 이하윤의 ‘물레방아’, 정지용의 ‘이른 봄 아침’ 등이 실렸다. 박용철은 ‘떠나가는 배’, ‘이대로가랴만은’, ‘싸늘한 이마’,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게재했다.
박용철의 문학인생을 톺아보며 초가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본다. 토담 아래 고샅처럼 이어진 흙길을 밟으며 명작 ‘떠나가는 배’ 를 읊조린다. 시 속의 화자에게 떠남은 번민과 갈등을 환기하는 기제였을 것이다. 거기엔 일제 치하의 억압적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의 내밀한 바람이 드리워져 있다. 한편으론 눈에 밟히는 고향 산천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는 아릿한 마음도 담겨 있다. 길항의 틈바구니에서 화자는 못내 쓸쓸하고 아팠을 거다.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ㅉㅗㅈ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만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떠나가는 배’) 전문
![]() 생가에 세워진 시비 ‘떠나가는 배’. |
노란 초가 뒤로 무성히 자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정원은 자연 그대로의 생명을 피워낸다. 나붓나붓 피어난 매화꽃에서 잔향이 밀려온다. 안채 어딘가에서 안경을 낀 사색에 잠긴 시인이 나올 것만 같다.
문학에 진심이었던 박용철은 ‘시문학’ 창간호의 ‘후기’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는 ‘문학은 그 민족의 국어를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민족의식과 순수 서정을 견지했던 용아의 시정신은 오늘날 광주문학을 있게 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맺힘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는 지나가는 걸음에 슬쩍 읽어치우기를 바라지 못하고 우리의 시는 열 번 스무 번 되씹어 읽고 외워지기를 바랄 뿐 가슴에 느낌이 있을 때 절로 읊어 나오고 느낌이 일어나야만 한다. 한말로 우리의 시는 외워지기를 구한다. 이것이 오직 하나 우리의 오만한 선언이다(중략) 한민족의 언어가 발달의 어느 정도에 이르면 국어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문학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국어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