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의 선비정신으로 지성적 詩 세계 일군 ‘한국의 엘리엇’
[ ‘광주 현대문학의 아버지’ 김현승]
1913년 평양 출생…부친따라 광주로
근대기 양림동 정착하며 기독교에 영향
무등산 바라보며 지고한 시심 키워
식민지 현실 속 민족 고통 절제된 표현
지조·절개 지킨 문인으로도 자리매김
6·25 전시에도 문예지 발간 주도
1913년 평양 출생…부친따라 광주로
근대기 양림동 정착하며 기독교에 영향
무등산 바라보며 지고한 시심 키워
식민지 현실 속 민족 고통 절제된 표현
지조·절개 지킨 문인으로도 자리매김
6·25 전시에도 문예지 발간 주도
![]() 남구 양림동은 다형 김현승이 문학적 꿈을 키운 장소성을 내재하는 곳이다. 사직공원 전망타워에서 바라본 양림동 시가지 모습. |
양림동 언덕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춘다. 햇살은 그윽하고 감미롭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청명한 날씨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냥 따사롭고 볕이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다. 오늘 느끼는 저 봄의 따스함의 이면에는 많은 이들의 눈물과 고통이 스며 있을 것이다. 그저 예사로이 다가오지 않는다.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진리 것 가운데 하나가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은 없다’라는 말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들도 그 이면에는 눈물과 아픔과 고통, 시련의 시간이 드리워져 있다는 의미다. 지천으로 피어난 봄꽃은 겨울 찬바람과 폭설을 이겨낸 인고의 순간들이 있었고 가을의 향기롭고 탐스러운 과일은 살갗을 데일만큼 뜨거운 여름의 폭염을 견뎌냈다.
해마다 봄은 오지만 올해의 봄은 여느 해와 달랐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었다. 지금도 ‘온전한 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빼앗긴 봄’이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이후의 파면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지난한 과정이었다. 봄을 되찾기까지 많은 이들은 혹한의 겨울 광장을 떠나지 못하고 목 놓아 외쳐야 했다.
그렇게 4월은 여전히 ‘잔인한 달’이며 가슴 아픈 상흔의 달이다. 제주 4·3, 4·19혁명, 그리고 4·16 세월호 참사 등 우리 현대사에서 4월은 가혹한 달로 기억된다. 지금도 4월의 슬픔과 고통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침윤돼 있다. 계절적인 ‘혹한의 겨울’은 지나갔지만 심리적인 혹한의 추위가 여전히 진행 중인 까닭이다.
양림동에 오면 그 시인이 생각난다. 한 마리 고고한 학 같기도 하고, 푸른 언덕에 의연히 서 있는 플라타너스 같기도 하다. 고전적인 시인의 상을 떠올릴 수 있겠다. 커피를 좋아했으며 고독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그는 천상 시인이었으며 시인으로만 존재했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의 광주 현대문학은 성장할 수 있었고 그 뿌리를 견고히 내릴 수 있었다.
다형 김현승 시인. 그는 오늘의 광주 현대문학을 일굴 수 있게 밑거름이 됐던 ‘옥토’와 같은 시인이다. 특히 남구 양림동은 소년 김현승이 무등산을 바라보고 시심을 키웠던 곳이다. 그곳에는 다형의 문학적 흔적은 물론 그의 시업을 기리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김현승은 1913년 4월 4일 평양에서 아버지 김창국과 어머니 양응도 사이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인 김창국 목사는 열세 살 때 전주에서 최초 세례를 받은 5명의 신자 중 한 명이었다. 김창국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로 진학했다. 첫 부임지인 제주에서 지역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 이후 광주로 오게 된다.
부친이 광주 양림교회로 부임하면서 양림동은 소년 김현승에게는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한다. 비록 태어난 고향은 평양이었지만 문학적 의미에서 탯자리는 양림동인 셈이다. 소년 김현승은 당시 선교사들이 정착한 양림동에서 ‘광주의 어머니’ 무등산을 바라보며 맑고도 지고한 시심을 키웠다. ‘광주의 예루살렘’인 양림동이 그에게 무궁무진한 ‘시의 저수지’와도 같은 장소성을 지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양림동은 근대기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와 정착한 지역이다. 기독교 영향을 받아 학교와 병원 등 근대 건축물이 건립됐다. 다형의 기독교적이며 지성적인 시 세계는 그러한 환경의 토대 위에서 발아했을 터였다.
김현승은 숭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듬해 위장병의 악화돼 잠시 광주에서 요양을 한다. 당시 그는 청소년시절부터 남몰래 품어온 문학에 대한 꿈을 시 쓰기를 통해 풀기 시작한다.
‘김현승시전집’(관동출판사, 1974)의 자술연보에는 문단 데뷔 정황이 나와 있다.
“그해의 2주간 남짓한 겨울방학에는 광주로 하향(下鄕)을 단념하고, 4층 건물의 기숙사에 홀로 남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작(詩作)에 전념한 결과 2편의 장시(長詩)를 얻게 되었고, 이 2편의 시가 당시 시인이며, 문과 교수였던 양주동 교수의 눈을 끌게 되어 교수의 소개로 드디어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다”(이승철, ‘광주의 문학정신과 그 뿌리를 찾아서’, 문학들, 2019)
무명이나 다름없던 김현승의 작품을 동아일보가 2편이나 지면에 할애한 것은 꽤나 파격적인 대우였다.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가 그 두 작품이다. 다음은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의 일부다.
“해를 쫓아 버린 검은 광풍이 눈보라를 날리며 개선행진을 하고 있습니다그려!/ 불빛 어린 창마다 구슬피 흘러나오는 비련의 송가를 듣습니까?/ 쓸쓸한 저녁이 이를 때 이 땅의 거주민이 부르는 유전의 노래입니다./ 지금은 먼 이야기, 여기는 동방/ 그러나 우렁차고 빛나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던 날/ 오직 한 마디의 비가를 이 땅에 남기고 선인의 발자취가/ 어두움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합니다./ 그리하여 눈물과 한숨, 또한 내어버린 웃음 위에/ 표랑의 역사는 세월과 함께 쓰여져 왔다 합니다.”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작품이다. 민족적 고통과 비애를 타파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정치한 이미지와 메타포로 형상화한다.
많은 평자들은 다형을 우리나라 현대문학이 자랑하는 지성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절제된 감수성과 여백미 느껴지는 모던함은 그 시대 여느 시인과 비교되지 않는다.
한국시단에서 뛰어난 지성 시인이자 지조와 절개를 지킨 문인으로서의 위치도 점하고 있다. 당시 시류에 영합한 글을 쓰거나 시를 출세의 도구로 활용한 문인들도 있었지만, 다형은 오롯이 문학의 본질을 추구했다. 그를 가리켜 ‘한국의 엘리엇’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런 연유다. 선비 정신을 기반으로 지적이면서도 모던한 문학을 지향한 것은 후대 시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다형이 키워낸 지역의 문인들도 많다. 올해 작고한 손광은 시인(전 전남대 국문과 교수)을 비롯해 1만 수 넘게 시를 창작한 진헌성 시인(진내과 원장), 문순태 소설가(전 광주대 문창과 교수), 이은봉 시인(전 광주대 문창과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순태 작가는 문청시절 양림동에 거주하던 김현승 시인을 문우들과 함께 찾아가 뵙곤 했다. 문 작가가 기억하는 다형은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였다. 다형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다형 김현승의 시간’(도서출판 한림, 2022)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선생님은 봄과 여름에는 수피아여고 뒷산 산책을 즐겨했고 가을이면 전남농대의 플라타너스 숲길을 좋아했다. 어쩌면 선생님은 숲길에서 ‘플라타너스’라는 시의 영감을 얻었는지도 몰랐다. 약간 귀족적이면서도 외롭게 느껴지는 플라타너스와, 가까이 다가가기에 너무 어려워 보이기만 했던 선생님은 어딘가 닮아 보였다. 플라타너스는 5월의 상큼한 초록 빛깔도 핥아주고 싶을 정도로 정겹지만, 노랗거나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여 가벼운 바람에도 떨어져 흩날리는 11월에는 쓸쓸함과 함께 진중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선생님은 늘 홀로 서 있는 나무처럼 외로워 보였다.”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김현승 시인이 주도해 창간한 문예지 ‘신문학’(新文學)은 지역 문학을 풍성하게 일군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6·25로 대부분 문예지 발간이 중단된 상황이었다. 당시 문예지에는 다형 외에도 광주지역 문인들인 박흡, 이동주, 이석봉 등의 시를 비롯해 장용건, 손철, 승지행, 임병주 등의 소설과 최태응, 이은태, 이은상, 조희권 등의 수필이 수록됐다. ‘신문학’은 1930년대 ‘시문학’ 이후 광주전남 문인들이 만든 문예지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가 깊다.
다형은 조선대 교수 시절 주옥 같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플라타너스’, ‘가을의 기도’, ‘옹호자의 노래’ 등 시편들은 오늘날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들이다. 양림동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다형의 시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진리 것 가운데 하나가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은 없다’라는 말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들도 그 이면에는 눈물과 아픔과 고통, 시련의 시간이 드리워져 있다는 의미다. 지천으로 피어난 봄꽃은 겨울 찬바람과 폭설을 이겨낸 인고의 순간들이 있었고 가을의 향기롭고 탐스러운 과일은 살갗을 데일만큼 뜨거운 여름의 폭염을 견뎌냈다.
양림동에 오면 그 시인이 생각난다. 한 마리 고고한 학 같기도 하고, 푸른 언덕에 의연히 서 있는 플라타너스 같기도 하다. 고전적인 시인의 상을 떠올릴 수 있겠다. 커피를 좋아했으며 고독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그는 천상 시인이었으며 시인으로만 존재했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의 광주 현대문학은 성장할 수 있었고 그 뿌리를 견고히 내릴 수 있었다.
![]() 김현승 시인 <광주일보 DB> |
김현승은 1913년 4월 4일 평양에서 아버지 김창국과 어머니 양응도 사이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인 김창국 목사는 열세 살 때 전주에서 최초 세례를 받은 5명의 신자 중 한 명이었다. 김창국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로 진학했다. 첫 부임지인 제주에서 지역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 이후 광주로 오게 된다.
부친이 광주 양림교회로 부임하면서 양림동은 소년 김현승에게는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한다. 비록 태어난 고향은 평양이었지만 문학적 의미에서 탯자리는 양림동인 셈이다. 소년 김현승은 당시 선교사들이 정착한 양림동에서 ‘광주의 어머니’ 무등산을 바라보며 맑고도 지고한 시심을 키웠다. ‘광주의 예루살렘’인 양림동이 그에게 무궁무진한 ‘시의 저수지’와도 같은 장소성을 지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양림동은 근대기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와 정착한 지역이다. 기독교 영향을 받아 학교와 병원 등 근대 건축물이 건립됐다. 다형의 기독교적이며 지성적인 시 세계는 그러한 환경의 토대 위에서 발아했을 터였다.
김현승은 숭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듬해 위장병의 악화돼 잠시 광주에서 요양을 한다. 당시 그는 청소년시절부터 남몰래 품어온 문학에 대한 꿈을 시 쓰기를 통해 풀기 시작한다.
‘김현승시전집’(관동출판사, 1974)의 자술연보에는 문단 데뷔 정황이 나와 있다.
“그해의 2주간 남짓한 겨울방학에는 광주로 하향(下鄕)을 단념하고, 4층 건물의 기숙사에 홀로 남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작(詩作)에 전념한 결과 2편의 장시(長詩)를 얻게 되었고, 이 2편의 시가 당시 시인이며, 문과 교수였던 양주동 교수의 눈을 끌게 되어 교수의 소개로 드디어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다”(이승철, ‘광주의 문학정신과 그 뿌리를 찾아서’, 문학들, 2019)
무명이나 다름없던 김현승의 작품을 동아일보가 2편이나 지면에 할애한 것은 꽤나 파격적인 대우였다.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가 그 두 작품이다. 다음은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의 일부다.
“해를 쫓아 버린 검은 광풍이 눈보라를 날리며 개선행진을 하고 있습니다그려!/ 불빛 어린 창마다 구슬피 흘러나오는 비련의 송가를 듣습니까?/ 쓸쓸한 저녁이 이를 때 이 땅의 거주민이 부르는 유전의 노래입니다./ 지금은 먼 이야기, 여기는 동방/ 그러나 우렁차고 빛나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던 날/ 오직 한 마디의 비가를 이 땅에 남기고 선인의 발자취가/ 어두움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합니다./ 그리하여 눈물과 한숨, 또한 내어버린 웃음 위에/ 표랑의 역사는 세월과 함께 쓰여져 왔다 합니다.”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작품이다. 민족적 고통과 비애를 타파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정치한 이미지와 메타포로 형상화한다.
많은 평자들은 다형을 우리나라 현대문학이 자랑하는 지성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절제된 감수성과 여백미 느껴지는 모던함은 그 시대 여느 시인과 비교되지 않는다.
한국시단에서 뛰어난 지성 시인이자 지조와 절개를 지킨 문인으로서의 위치도 점하고 있다. 당시 시류에 영합한 글을 쓰거나 시를 출세의 도구로 활용한 문인들도 있었지만, 다형은 오롯이 문학의 본질을 추구했다. 그를 가리켜 ‘한국의 엘리엇’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런 연유다. 선비 정신을 기반으로 지적이면서도 모던한 문학을 지향한 것은 후대 시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에 있는 김현승 시비. |
문순태 작가는 문청시절 양림동에 거주하던 김현승 시인을 문우들과 함께 찾아가 뵙곤 했다. 문 작가가 기억하는 다형은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였다. 다형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다형 김현승의 시간’(도서출판 한림, 2022)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선생님은 봄과 여름에는 수피아여고 뒷산 산책을 즐겨했고 가을이면 전남농대의 플라타너스 숲길을 좋아했다. 어쩌면 선생님은 숲길에서 ‘플라타너스’라는 시의 영감을 얻었는지도 몰랐다. 약간 귀족적이면서도 외롭게 느껴지는 플라타너스와, 가까이 다가가기에 너무 어려워 보이기만 했던 선생님은 어딘가 닮아 보였다. 플라타너스는 5월의 상큼한 초록 빛깔도 핥아주고 싶을 정도로 정겹지만, 노랗거나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여 가벼운 바람에도 떨어져 흩날리는 11월에는 쓸쓸함과 함께 진중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선생님은 늘 홀로 서 있는 나무처럼 외로워 보였다.”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김현승 시인이 주도해 창간한 문예지 ‘신문학’(新文學)은 지역 문학을 풍성하게 일군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6·25로 대부분 문예지 발간이 중단된 상황이었다. 당시 문예지에는 다형 외에도 광주지역 문인들인 박흡, 이동주, 이석봉 등의 시를 비롯해 장용건, 손철, 승지행, 임병주 등의 소설과 최태응, 이은태, 이은상, 조희권 등의 수필이 수록됐다. ‘신문학’은 1930년대 ‘시문학’ 이후 광주전남 문인들이 만든 문예지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가 깊다.
다형은 조선대 교수 시절 주옥 같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플라타너스’, ‘가을의 기도’, ‘옹호자의 노래’ 등 시편들은 오늘날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들이다. 양림동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다형의 시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