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와 공감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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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정말 더운 것 같아”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엘니뇨’가 어떻고 ‘라니냐’가 어떻다고 하면서 다들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온도가 계속 상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상 기후와 기온 상승의 원인은 무분별한 개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연환경의 파괴와 지칠 줄 모르는 인간 탐욕의 끝없는 소비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은 받는 그대로 돌려준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공동의 집인 지구라는 말이 우습게도 자연 파괴의 속도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앞으로 더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그래서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스페인어 격언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원 딸린 집(garden-home)인 지구를 돌보는데 실패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우리 인간은 가끔 용서하지만, 지구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구를 망가트린 것이라면, 그 응답은 아주 부정적이 될 것”이라는 말씀도 공감한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함께’라는 말의 의미를 집중해야 한다. ‘함께’라는 말은 서로를 존중하고 ‘나’와 ‘너’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도 내재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감각이 있는데, 그것은 ‘공감’ 능력이다. 최근 들어 자주 듣는 공감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명확하다. 공감은 고통과 슬픔 등의 감정에 동의한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고통과 슬픔에 몸과 마음으로 동참하겠다는 행동이 담긴 뜻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감이라는 말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 슬픔에 함께 슬퍼하는 동참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로 인한 자연재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의 집이 위기에 처해있다. 앞으로 더 큰 재난과 위기가 닥칠 것이 예측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공감할 것인가? 더 이상 자연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말로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공감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난과 위기는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질문이 불편하다. 공감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공감하고 함께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편안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익숙한 것을 내려놔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편한 것은 싫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잘 만들어 내면서도 포기하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습관이다. 그런데 그 습관은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려 하고, 익숙한 것으로 향하게 하며, 그 자리에 안주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혹시 이것이 내 삶을 독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마태오 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제시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문은 작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길을 찾는 사람은 적습니다.” 생명의 길인 좁은 문,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이웃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삶이다. 그래서 이 좁은 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 최고의 가치라고 일컫는 물질과 돈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어리석고 뒤처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논리와 이치, 그리고 물질과 돈에 가치를 두었다가 넘어지고 폭력을 당하고 죽음에까지 이르렀는지 모른다. 좁은 문으로 향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공감하기 때문이고, 함께 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의 현실, 어떻게 공감할 것이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 삶이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는지? 혹시 내 편안함이 자연과 세상을 더럽힌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지? 이 포기는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크다. 포기하는 것은 서로를 살리는 좁은 문이 될 수 있고, 기후 위기에 처한 우리가 서로를 공감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포기하는 것은 결국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이 질문이 불편하다. 공감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공감하고 함께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편안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익숙한 것을 내려놔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편한 것은 싫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잘 만들어 내면서도 포기하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습관이다. 그런데 그 습관은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려 하고, 익숙한 것으로 향하게 하며, 그 자리에 안주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혹시 이것이 내 삶을 독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마태오 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제시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문은 작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길을 찾는 사람은 적습니다.” 생명의 길인 좁은 문,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이웃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삶이다. 그래서 이 좁은 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 최고의 가치라고 일컫는 물질과 돈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어리석고 뒤처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논리와 이치, 그리고 물질과 돈에 가치를 두었다가 넘어지고 폭력을 당하고 죽음에까지 이르렀는지 모른다. 좁은 문으로 향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공감하기 때문이고, 함께 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의 현실, 어떻게 공감할 것이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 삶이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는지? 혹시 내 편안함이 자연과 세상을 더럽힌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지? 이 포기는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크다. 포기하는 것은 서로를 살리는 좁은 문이 될 수 있고, 기후 위기에 처한 우리가 서로를 공감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포기하는 것은 결국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