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산사태의 기억-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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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산사태의 기억-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3년 07월 28일(금) 00:00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나는 템플 스테이관 수해 복구 마무리 작업도 확인할 겸, 주차장과 템플 스테이관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산사태로 새로운 계곡이 생겨 버린 곳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산사태가 만든 계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획에 없던 돌발 행동이었다. 다만 산사태의 실상을 좀 더 제대로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부추겼을 따름이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것은 산사태를 향한 분노였다. ‘네 놈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우리를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 놓은거야!’라는 분노. 나는 기어코 산사태의 시작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산사태가 시작된 곳은 주변이 잔디로 잘 가꾸어진 무덤 터 끝자락이었다. 정작 있어야 할 무덤은 이장했는지 없고 대략 30여 평 되는 반반한 잔디밭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무덤 주변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잡목과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무성한 잡목과 잡초 사이로 흩어져 내려가던 엄청난 물들은 완만하고 반반한 잔디밭으로 모여서 덩치를 크게 불렸을 것이다. 그 결과 무덤 가장자리의 낡은 축대가 무너지고 그 여파로 함몰이 시작되어 산사태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산사태의 시작을 눈으로 확인한 나는 묘한 쾌감에 휩싸였다. 정복감? 아니면 ‘별 것도 아닌 것이 까불고 있어!’ 하는 느낌? 왜 인간이 그토록 자연을 알아내려고 발버둥쳐 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자연의 정체를 모를 때, 자연 앞에선 인간은 무력하고 왜소하다. 그러나 자연의 정체를 알고 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자연도 별것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별것 아니란 생각은 곧바로 두려움과 분노를 잠재운다.

뭐가 되었건 알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예전의 두려움과 공포가 클수록 비밀을 밝힌 쾌감도 커지는 법이다.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클수록 인간은 자신이 자연보다 위대하다는 자만심에 휩싸인다. 그리고 복수하는 심정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자연을 파괴한다.

내친 김에 산사태가 시작된 지점에서 토끼등 등산로까지의 상황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10미터 정도 나아가다 포기해야만 했다. 덤불이 너무나 무성해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무덤터로 다시 나오려 했지만, 황당하게도 덤불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깊은 산속도 아니었다. 바로 절 뒤였다. 제멋대로 자란 잡목과 잡초 속에서는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법. 밀려오는 불안감에 압도당한 채, 십여 분 정도 정신없이 헤매다가 겨우 빠져나오는 순간, 맨살을 드러낸 산사태 계곡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 전 만해도 나를 분노에 휩싸이게 했던 바로 그 곳이었다. 안전한(!) 계곡으로 빠져나오고 나서야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음을 알았다.

산사태 계곡은 내게 아무런 해꼬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분노했다가, 자만심에 넘쳤다가, 두려움에 휩싸였다가, 반가운 마음에 안도감까지 느꼈다. ‘도대체 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뭐지?’ 한참을 생각했다.

희로애락 같은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연스럽다 함은 곧 자연(自然)답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자연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다’는 표현은 ‘인간(人間)스럽다’로 수정되어야 하다. 다만 나는 지극히 인간스러웠을 따름이었다. 산사태를 분노에 찬 자연의 폭주라고 규정한 것은 우리 인간이었다. 산사태는 인연 따라 생겨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인간이기에 자연조차 인간스럽게 포장하려 한다. 하지만 자연을 인간화하기 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순리에 가깝다. 이제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덧붙임. 2020년 8월 8일, 54일간이나 이어진 기나긴 장마의 마지막 날, 밤새 집중 호우가 내렸다. 그날, 증심사 템플 스테이관 구역은 산사태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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