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광주 양파정 - 문인들 교유의 공간이자 일제 강점기 소년운동의 태동지
광주 이름난 부자 정낙교 1914년 건립
고려후기 광주천에 있던 석서정의 옛터
사직공원 경찰충혼탑 인근 언덕에 위치
아랫길 사직동 통기타거리 핫플레이스
전국한시대회 계기로 양파정 사단 형성
아동문학가·시인 김태오, 소년운동 전개
고려후기 광주천에 있던 석서정의 옛터
사직공원 경찰충혼탑 인근 언덕에 위치
아랫길 사직동 통기타거리 핫플레이스
전국한시대회 계기로 양파정 사단 형성
아동문학가·시인 김태오, 소년운동 전개
![]() 1914년 건립된 양파정은 문인들의 교유 공간이자 소년운동이 전개됐던 역사적인 누정이다. |
양파정(楊波亭)은 1914년 건립돼 1932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작지붕의 양파정은 사방이 훤히 트여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적어도 정자가 자리한 인근까지는 단아하면서도 고즈넉한 풍경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정자 주변은 잘 정리돼 단출하면서도 고상미를 주지만, 전체적으로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어 답답한 느낌도 없지 않다.
시야는 툭 터져야 시원함을 준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의 시야는 광주천이 흐르는 시내 방향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주변에 둘러쳐진 나무숲이 완만한 동산의 맛을 주는 건 맞다. 삽상한 운치도 좋다. 그럼에도 누정의 자리에서 너머의 시내까지 볼 수 없는 건 다소의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양파정을 알현하기에 앞서 잠시 이곳 누정을 품은 양림동과 사직동을 알 필요가 있다. 양림동은 근대 초기 미국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다. ‘광주의 예루살렘’이라는 수사는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반영한다. 선교사들이 건립한 학교와 교회, 병원이 들어서면서 ‘서양촌’으로도 불렸다. 양림동 골목마다 선교사들의 희생과 나눔의 정신, 광주의 의로운 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지리적으로 양림동은 양림산과 사직산으로 연결된 남동쪽에 자리한다. 조선시대 양림산에는 풍장터가 있었다. 읍성과 거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동네를 품고 있어 풍장터로 쓰였던 모양이다. 조선 후기만 해도 풍장의 풍습이 남아 있었던 걸 보면 풍장터는 문헌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의 땅’ 풍장터는 시대가 흘러 생명의 땅으로 전이됐다. 양림산이 근대문화의 보고인 양림동을 품에 안은 문화의 땅으로 부활한 것은 단순히 시간의 역설로만 해명되지 않는다. ‘한 알의 씨앗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의 구절과 양림동의 부상은 맞아떨어진다.
양림산과 이어진 사직산에는 사직공원이 있다. 사직공원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 지정된 광주 제2호 공원이다. 지금은 통기타거리로 유명한 사직동은 양림동과 함께 핫 플레이스이다.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적 감성과 문화의 향기와 고즈넉함이 스며 있다.
양파정을 알기 위해선 양림동의 근대문화와 아울러 사직공원의 역사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천에서 양림파출소를 지나 다소 가파른 언덕배기를 오르면 사직동 통기타 거리가 나온다. 여름날이라 뜨거운 햇살이 언덕 위로 쏟아져 내린다. 낭만의 거리도 더위 앞에는 어쩔 수 없나보다. 휑한 거리에 인적은 드물고 하오의 뙤약볕이 들이치고 있을 뿐이다.
사직공원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면 경찰충혼탑이라는 이정표와 만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언덕을, 아니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데크를 오르다 보면 지척에 작은 동산과 마주한다. 야트막한 자리에 버성기듯 둘러싸인 숲은 작은 언덕의 그것과 맞춤하다. 그리고 양지바른 언덕에 숲의 풍경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정자가 들어앉아 있다.
양파정은 정낙교(鄭洛敎·1863~1938)라는 인물이 지었다. 그는 현준호, 최명구와 함께 광주의 이름난 부자였다. 그에게는 ‘광주전남의 부호’, ‘광주의 복인(福人)’ 수사가 따랐다. 다음은 정경운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가 양파정에 관한 쓴 글 가운데 일부다.
“정낙교는 본래 광주군 송정리에서 살다가 1908년 양림리로 이사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재력을 기반으로 지역유지 대열에 들어서면서 1917년 광주농공은행 이사 및 광주금융조합장을 지낸다. 1919년 4월엔 광주군의 참사(參事)로 임명받지만 곧바로 사임해버린다. 참사는 요새로 따지자면 일종의 행정자문위원이다. 일제는 1919년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모든 지역의 군(郡)에서 지방유력자들 중 2명을 지명해 참사를 맡겨 식민통치의 보조역할을 하게 했었다. 아마도 정낙교가 3개월 만에 참사직을 그만둔 것도 이런 역할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광주문화재단, ‘양파정 춘설헌’, 심미안, 2019)
정낙교가 정자를 이곳 양림산 언덕에 세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본디 이곳은 석서정(石犀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석서정의 옛터라고 전해온다.
석서정은 고려 말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석서정기’에도 나온다. ‘빛의 고을은 지세가 다 큰 산인데 북쪽만 평탄하다’는 내용이 서두에 나온다. 여기에서 빛고을의 유래가 예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전의 광주천, 다시 말해 오늘날과 같은 직강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폭이 일정치 않았다. 특히 양파정 아래 인근은 폭이 좁아 물난리가 자주 발생했다. 강폭이 장구의 허리처럼 가늘어지는 구간이었다. 1380년대쯤 광주목사였던 김상은 원래의 좁은 물길 옆에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큰물에 대비했다. 석서의 원 뜻은 ‘물로 만든 물소’라는 것이다.
조일형 한국학호남진흥원 박사는 “양파정에는 그러한 석서정에 걸친 역사적 내력도 담겨 있다. 양파정에서는 매년 전국 한시대회가 열렸다. 자연스레 대회를 계기로 양파정 시단이 형성되었다. 현재 양파정에는 정낙교의 원기(原記)와 원운(原韻) 등 당내 문장가들의 시들이 걸려 있다”고 설명했다.
“난간 위에 기대앉아 하루를 머무르니/ 아름다운 모습이 전당(錢塘)처럼 스친다/ 동쪽하늘 서석에는 달이 떠 있고/ 서쪽 유교 아래로는 맑은 연기가 그윽하다/ 늦은 나이에 낚시하며 뜻을 즐겨하며/ 여러 문우들 맞아 함께 자적하네/ 어지러운 세상 소리 들려올까 하나/ 비에 젖은 백판으로 사립문을 가렸네”(정낙교 ‘원운’)
양파정은 문인들의 교유의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소년운동의 태동지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시문을 지었던 이곳에 일련의 소년들이 출입하며 소년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1919년 3·1운동 자장이 아직 남아 있던 즈음 김태오(1903~1970)가 소년운동의 기치를 올린다. 김태오는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로 시작되는 ‘강아지’를 작사한 인물이다.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그가 동료들과 양파정에서 전개했던 소년운동은 국내 소년운동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양파정을 내려와 잠시 사직공원을 둘러본다. 뜨거운 햇볕의 기세는 잠시 누그러져 있지만 후텁지근함은 여전하다. 장마철 특유의 날씨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일반적으로 사직(社稷)은 “나라나 조정, 왕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 한편으론 “고대 중국에서 새로 나라를 세울 때 천자와 제후가 제사를 지내던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사직공원에는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다. 현재의 사직단은 사직공원 전망대 아래쪽 평평한 곳에 자리한다. 제를 지내는 사직단과 위패를 모시던 사당은 종사(宗社)라고 부를 정도로 신성시했다.
문헌에 따르면 사직의 역사는 삼국시대로까지 이어진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소출 농산물은 나라 살림의 근간이었다. 무등산을 연한 무진주 고을의 옥토와 풍부한 산물은 여느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을 선사했을 것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양파정을 알현하기에 앞서 잠시 이곳 누정을 품은 양림동과 사직동을 알 필요가 있다. 양림동은 근대 초기 미국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다. ‘광주의 예루살렘’이라는 수사는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반영한다. 선교사들이 건립한 학교와 교회, 병원이 들어서면서 ‘서양촌’으로도 불렸다. 양림동 골목마다 선교사들의 희생과 나눔의 정신, 광주의 의로운 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 사직공원에 있는 김현승 시 관련 조형물. |
그러나 ‘죽음의 땅’ 풍장터는 시대가 흘러 생명의 땅으로 전이됐다. 양림산이 근대문화의 보고인 양림동을 품에 안은 문화의 땅으로 부활한 것은 단순히 시간의 역설로만 해명되지 않는다. ‘한 알의 씨앗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의 구절과 양림동의 부상은 맞아떨어진다.
양림산과 이어진 사직산에는 사직공원이 있다. 사직공원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 지정된 광주 제2호 공원이다. 지금은 통기타거리로 유명한 사직동은 양림동과 함께 핫 플레이스이다.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적 감성과 문화의 향기와 고즈넉함이 스며 있다.
![]() 양파정 아래 사직동 통기타 거리. |
사직공원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면 경찰충혼탑이라는 이정표와 만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언덕을, 아니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데크를 오르다 보면 지척에 작은 동산과 마주한다. 야트막한 자리에 버성기듯 둘러싸인 숲은 작은 언덕의 그것과 맞춤하다. 그리고 양지바른 언덕에 숲의 풍경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정자가 들어앉아 있다.
양파정은 정낙교(鄭洛敎·1863~1938)라는 인물이 지었다. 그는 현준호, 최명구와 함께 광주의 이름난 부자였다. 그에게는 ‘광주전남의 부호’, ‘광주의 복인(福人)’ 수사가 따랐다. 다음은 정경운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가 양파정에 관한 쓴 글 가운데 일부다.
“정낙교는 본래 광주군 송정리에서 살다가 1908년 양림리로 이사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재력을 기반으로 지역유지 대열에 들어서면서 1917년 광주농공은행 이사 및 광주금융조합장을 지낸다. 1919년 4월엔 광주군의 참사(參事)로 임명받지만 곧바로 사임해버린다. 참사는 요새로 따지자면 일종의 행정자문위원이다. 일제는 1919년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모든 지역의 군(郡)에서 지방유력자들 중 2명을 지명해 참사를 맡겨 식민통치의 보조역할을 하게 했었다. 아마도 정낙교가 3개월 만에 참사직을 그만둔 것도 이런 역할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광주문화재단, ‘양파정 춘설헌’, 심미안, 2019)
정낙교가 정자를 이곳 양림산 언덕에 세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본디 이곳은 석서정(石犀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석서정의 옛터라고 전해온다.
석서정은 고려 말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석서정기’에도 나온다. ‘빛의 고을은 지세가 다 큰 산인데 북쪽만 평탄하다’는 내용이 서두에 나온다. 여기에서 빛고을의 유래가 예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전의 광주천, 다시 말해 오늘날과 같은 직강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폭이 일정치 않았다. 특히 양파정 아래 인근은 폭이 좁아 물난리가 자주 발생했다. 강폭이 장구의 허리처럼 가늘어지는 구간이었다. 1380년대쯤 광주목사였던 김상은 원래의 좁은 물길 옆에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큰물에 대비했다. 석서의 원 뜻은 ‘물로 만든 물소’라는 것이다.
조일형 한국학호남진흥원 박사는 “양파정에는 그러한 석서정에 걸친 역사적 내력도 담겨 있다. 양파정에서는 매년 전국 한시대회가 열렸다. 자연스레 대회를 계기로 양파정 시단이 형성되었다. 현재 양파정에는 정낙교의 원기(原記)와 원운(原韻) 등 당내 문장가들의 시들이 걸려 있다”고 설명했다.
“난간 위에 기대앉아 하루를 머무르니/ 아름다운 모습이 전당(錢塘)처럼 스친다/ 동쪽하늘 서석에는 달이 떠 있고/ 서쪽 유교 아래로는 맑은 연기가 그윽하다/ 늦은 나이에 낚시하며 뜻을 즐겨하며/ 여러 문우들 맞아 함께 자적하네/ 어지러운 세상 소리 들려올까 하나/ 비에 젖은 백판으로 사립문을 가렸네”(정낙교 ‘원운’)
양파정은 문인들의 교유의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소년운동의 태동지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시문을 지었던 이곳에 일련의 소년들이 출입하며 소년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1919년 3·1운동 자장이 아직 남아 있던 즈음 김태오(1903~1970)가 소년운동의 기치를 올린다. 김태오는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로 시작되는 ‘강아지’를 작사한 인물이다.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그가 동료들과 양파정에서 전개했던 소년운동은 국내 소년운동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양파정을 내려와 잠시 사직공원을 둘러본다. 뜨거운 햇볕의 기세는 잠시 누그러져 있지만 후텁지근함은 여전하다. 장마철 특유의 날씨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일반적으로 사직(社稷)은 “나라나 조정, 왕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 한편으론 “고대 중국에서 새로 나라를 세울 때 천자와 제후가 제사를 지내던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 사직공원에 있는 사직단. |
문헌에 따르면 사직의 역사는 삼국시대로까지 이어진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소출 농산물은 나라 살림의 근간이었다. 무등산을 연한 무진주 고을의 옥토와 풍부한 산물은 여느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을 선사했을 것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