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말 - 박진영 공감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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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말 - 박진영 공감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2023년 05월 29일(월) 21:30
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친구 가족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함께 했다. 아이는 배가 고팠던지 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이를 지켜본 친구의 남편이 “혹시 엄마가 늘 굶기는 거 아니야?”라고 농담을 했다. 아이의 아빠는 “종종 그렇죠, 뭐.”라고 대답했다. 농담에 장단을 맞추느라 한 말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아이 엄마는 마음이 크게 상하고 말았다.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가끔 늦은 시각에 밥을 챙겨 줬던 게 늘 마음에 걸렸고, 아이에게 미안하던 참이었다. 그래도 남편은 그걸 이해해줄 알았는데, 도리어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놀린 것 같았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화를 내지 말고, 서운했던 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으라고 충고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흔히 일어난다. 십 년 가까이 ‘실언’을 연구하면서 쉼 없이 확인하는 것이 있다. 많은 이들이 가장 크게 상처받은 말을 대부분 가족, 또는 친구 같은 가까운 사람에게 들었다고 지목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가까운 사람과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하고 공감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내가 설령 잘못했거나 잘못 생각하고 있더라도 상대만은 내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무참히 깨질 때, 사람은 실망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누가 잘못일까? 잘못된 기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맥락을 놓치고 공감을 못한 사람이? 나는 후자라고 본다.

“우리가 그저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기대하는 동감은 절친한 친구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작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공감해주지 않는 것보다, 내 편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던 친구나 가족이 공감해 주지 않을 때 실망을 넘어 화가 나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는 기뻐하는 일이나 칭찬하는 일에 공감해 주지 않을 때보다, 슬퍼하는 일이나 분개하는 일에 공감해 주지 않을 때 사람은 더 크게 실망한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상처가 된 말’을 이야기해 달라고 해서 들어 보면, 뜻밖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내용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청바지를 절대 입지 않는다는 한 30대 여성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시장에 옷을 사러 갔는데, 맘에 드는 청바지가 있어서 입어 보려고 집어 들었더니,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야, 네가 입으면 찢어져.’ 살쪘다고 놀림당하는 게 싫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옷을 조용히 내려놓고 말았죠. 내색은 안 했지만 그 친구가 정말 밉더군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 뒤론 청바지만 보면 그날 일이 생각나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거죠.”

친구는 평소처럼 농담을 했을 텐데, 당사자에게는 가시가 되어 마음에 깊이 박힌 것이다. 이런 가시는 가해자가 빼주지 않으면 뽑히지 않는다.

사람은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한 말은 대부분 잘 기억한다. 반면 내가 상대를 아프게 한 말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아프게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내게 상처가 된 말이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면, 상대를 만나 이러저러해서 내가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말해 주는 게 낫다. 말을 해 주고 내 마음을 이해한 상대의 사과를 받아야, 내 상처도 치유된다. 당사자도 그런 실언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5월 6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드디어 왕관을 썼다. 왕실과 불화를 겪고 있는 둘째 아들 해리 왕자가 대관식에 참석할 지가 관심거리였다. 해리 왕자는 부인과 자녀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 참석했다. 왕실 가족의 버킹엄궁 발코니 인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해리 왕자는 넷플릭스 다큐와 자서전을 통해 왕실과 윌리엄 왕세자의 치부를 폭로해 왕실의 눈총을 받아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해리 왕자의 마음도 불편할 것이다. 남을 비판하는 말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 쉽다. 가족이나 친구,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말은 특히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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