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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전라도는 왜의 땅? ‘전라도 천년사’ 유감
2023년 04월 27일(목) 01:00
‘전라도 천년사’라는 책이 있다. 전남·북·광주 세 지자체가 나랏돈 24억 원을 들여 34권으로 제작한 전라도역사책이다. 이 책의 내용이 전해지자 ‘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 500만 전라도민연대’ 등의 단체들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관점으로 서술되었다면서 비판했고, 집필자들과 학술토론을 요구했다. 그런데 무엇이 켕기는지 학술토론은 거부되었고 e북으로 먼저 공개해서 수정 제의를 받기로 했다.

공개된 e북을 보니 학술토론을 거부한 이유가 납득이 갔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들었다면 명실이 상부한 책이기 때문이다. 앞부분만 살펴봤는데도 문제가 너무 많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노골적으로 단군조선을 부인한 것(3권 44쪽)은 단군 부인에 가장 열을 올린 세력이 조선총독부라는 사실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역사관은 고대 전라도가 왜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한국학자들은 총론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고 자화자찬하고 본론에서는 ‘임나=가야’라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창하는 것으로 국민들을 속여 왔는데 ‘전라도 천년사’가 그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95년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소각한 야쿠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역사연구 한답시고 ‘일본서기 조선지명교’를 써서 왜가 지배한 임나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까지 차지했다고 우겼는데, ‘전라도 천년사’가 “맞습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야마토왜의 식민지 기문에 대해 ‘전라도 천년사’는 “기문은 남원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이 확실하다(4권 57쪽)”라고 말했다. 기문이란 무엇인가? ‘일본서기’ ‘계체(繼體) 7년(513)’조에는 신하인 백제왕이 황제인 왜왕에게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치면서 ‘반파국이 신의 기문땅을 빼앗았으니 하늘의 은혜로 돌려주소서’라고 빌었다고 나온다. 그러자 왜왕이 ‘은혜로운 조칙을 선포해서 기문을 백제에게 하사했다’는 것이다. 왜왕이 자기 마음대로 주었다 뺏을 수 있는 기문은 전북 남원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기문을 남원이라고 우긴 인물은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였다. 그가 1922년 ‘기문반파고(己汶伴跛考)’라는 허접한 논문에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은 섬진강 유역에 있는 남원에 해당해야 할 일이다”라고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우긴 것을 ‘전라도 천년사’가 “맞습니다”라고 계속 머리를 조아리는 중이다.

야마토왜의 식민지 임나 4현도 전라도에 갖다놨다. 임나4현은 ‘일본서기’ ‘계체 6년(512)’조에 백제에서 왜에 세금을 바치면서 “임나국의 상다리·하다리·사타·모루 4현을 하사해주소서”라고 빌자 왜왕이 감읍스럽게도 백제에게 하사했다는 곳이다. 북한학계의 김석형은 60년 전인 1963년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이란 논문을 통해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계가 일본열도에 진출해 세운 분국이라고 분석했다. 기문은 물론 임나4현도 모두 일본 열도에 있던 가야계 또는 백제계가 세운 분국(分國)이라는 것이 북한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전라도 천년사’는 “일본학자들은 (임나4현을) 주로 영산강유역에 비정하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 학자들은 주로 전남 동부지역으로 비정하는 경향이 있다(4권 55쪽)”면서 전라도가 왜의 식민지라고 서술했다. 북한의 가야사연구자 조희승은 ‘일제 어용사가들이 지배주의 관점에서 가야의 영역이 전라도 충청도까지 포괄한다는 억지주장을 했다(조희승, 북한한계의 가야사연구(60쪽))’고 비판했는데 ‘전라도 천년사’가 그 일제 지배주의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전라도 천년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눈뜨고 못 볼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동학3대장을 배출한 전라도가 어쩌다 왜의 식민지가 되었나? 전 도민이 지켜보는 ‘공개 학술 토론회’라는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동학, 의병, 독립전쟁 때 목숨 바친 수많은 호남인들의 순국정신을 모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