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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를 향하여
2020년 11월 27일(금) 07:00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호수는 청명한 가을을 품고 있다. 화순 만연사 아래 동구리 호수공원은 화순군민들이 즐겨 산책을 오는 곳이다. 휴일이라 삼삼오오 산책 나온 가족이나 친지들이 대부분이고,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모두들 티 없이 맑은 가을 하늘처럼 마냥 행복해 보인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 아래로 정겨운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이들이 불교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금 더 많은 행복과 조금 더 적은 고통? 이것 외엔 달리 없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마침 듣고 있던 이어폰에서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은행 잔고. 그의 희망은 이미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시작 부분이다. 모두 소소한 행복들을 책임져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것들이 희망도 소망이 아니라 한다. 그러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불교는 지금의 삶 자체가 고통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삶을 넘어 해탈의 길, 열반의 세상으로 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종교가 인간에게 친숙하던 시절엔 불교 역시 종교로서의 권위를 행사하고 또 그만한 역할을 했다. 종교가 푸대접받고 있는 오늘날, 종교로서 불교를 추앙하는 부류는 여전히 존재한다. 반면 신앙이 아니라 평범한 삶 속으로 불교를 끌어오려는 흐름 또한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전통적인 불교 안에서도 이런 역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이다. 명상은 사업이 되고, 절집에서 자연스럽게 힐링을 말하고, ‘템플’에서 ‘스테이’하며 지친 마음을 쉬어 가라 하고 있다.

물론 불교를 향한 첫걸음은 대개 고통스러운 삶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는 것,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그래서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불교는 지금의 삶을 인정하고 그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지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삶을 넘어서지 않고는 삶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털어낼 방법이 없음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인도한다.

이곳 호수공원에서 나는 삶의 관찰자이다. 삶의 관찰자는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의 참여자만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인생의 관찰자는 우리들 삶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 그러니까 실존의 불안, 나로 인한 고통들을 직시한다. 삶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자신의 삶을 관찰해야 한다. 관찰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삶의 무게를 덜어 내는데 그저 바라보는 것만한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삶 너머를 지향하려면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된다. 삶 전체를 건 결단을 요구한다. 그래야 지금의 삶을 너머 비상할 수 있다. 즉 깨달을 수 있다. 지금의 삶을 버리는 결단이 없는 깨달음은 모두 거짓이다.

어린 새는 둥지에서 오로지 먹기만 한다. 먹고 또 먹어서 제 스스로 날아오를 수 있는 힘을 비축한다. 어느 순간, 마침내 어린 새는 둥지를 떠나 비상하기 위한 날갯짓을 시작한다. 주저하고 망설이고 안주하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목숨을 건 결단을 내린다. 땅에 떨어져 죽더라도 언젠가는 둥지를 박차고 날아올라야 한다. 그것이 어린 새의 운명이다.

태어난 계곡을 떠난 어린 연어는 멀리 태평양 바다로 나간다. 어린 연어는 드넓은 바다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다시 고향의 계곡으로 돌아와 산란한다. 그러나 가끔 바다로 나가지 않고 고향의 계곡에서 어른이 되는 염치 없는 연어도 있다. 태평양 바다에서 돌아온 연어에 비하면 치어나 다름없을 정도로 체구가 왜소하다. 마치 다른 물고기 같은 그도 역시 산란하기 위해 우리들 눈에 익숙한 덩치 큰 다른 연어들 틈새를 기웃거린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어린 새가 창공을 갈망하듯, 삶 저 너머를 향한 동경과 열망은 아닐까? 기분 탓인지, 어깻죽지가 간질간질하다. 마침내 날개가 나올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날개도 돋지 않았다. 우리는 날아오르기 위해 작은 날개를 하염없이 퍼덕이는 어린 새일까? 아니면 바다로 나가지 않은 얍삽한 연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