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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의 글자 훈맹정음(訓盲正音)
2020년 11월 24일(화) 07:00
주윤정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
지난 11월 4일은 훈맹정음(訓盲正音)이 반포된지 94년 되던 날이었다. 훈맹정음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글 점자의 다른 이름으로, 1926년 박두성이 만들었다. 박두성은 교동 출신으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식민지 시절 맹아학교였던 제생원에서 교사로 일했다. 박두성의 호는 송암(松庵)인데 일설에는 강화도에서 보창학교란 야학을 통해 이동휘에게 사사를 받았고, 그에게서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뜻의 호를 받았다고 한다.

박두성은 이후 조선총독부가 일종의 문명화 선전을 위해 만든 특수학교인 제생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각장애인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제생원에서는 일종의 근대적 직업 교육으로 안마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안마사가 되기 위해서는 해부학 용어 등을 배워야 했다. 의학 용어를 일본어로 배우고, 더욱이 일본어 점자까지 배워야 하기에 조선인 학생들은 제대로 지식을 배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평양에서 로제타 홀이란 선교사가 뉴욕포인트 점자에 기반해 한글 점자를 만들었었지만, 이 역시 자음과 모음 체계가 분명한 조선어와는 맞지 않고 글자 수가 너무 많아 조선인 학생들이 익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박두성은 아이들이 좀 더 근대적 지식을 제대로 습득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한글 점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생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들과 ‘6화사’(六花社)라는 단체를 만들어 점자를 연구했다. 6화사는 당시 표준이 되던 브라이유식 점자가 6개 점으로 되어 있어서 있기도 했지만,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의 눈과 동음이의어인 ‘눈’(雪)이 육각형이기 때문에 여섯 개의 꽃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점자 개발 과정은 ‘맹사일지’ 등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국한문 혼용, 가타가나, 초서체 등으로 아주 꼼꼼히 적혀 있다. 우선 10개 정도의 가안을 만들어 놓고, 각 안의 장단점을 시각장애인 학생들과 토론하고 투표를 해서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훈맹정음이다.

박두성 선생은 이런 점자가 실제로 쓰이게 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지속했다. 우선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익힐 수 있도록 통신 교육을 실시했다. 점자를 익힌 시각장애인이 읽을 도서를 점역하고 그리고 점역한 도서를 우편으로 빌려 주는 일종의 점자도서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렇게 점역된 도서는 200여 종이 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100여 종만 남아 있다. 점역은 점역기와 아연판 등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점역된 도서는 ‘3·1운동’, ‘영결김구선생’, ‘천자문’, ‘우어(이솝우화)’, ‘금삼의 피’ 등 역사·문학·사회 등 다양한 주제의 저서를 포함했다. 이는 시각장애인들이 단순히 직업 교육만 받아서는 안 되고 세상이 변화하는 이치를 알고 교양을 쌓고 배워야 한다는 철학의 반영이었다.

점자 사용의 확산으로 해방 이후 총선거에서 시각장애인들은 점자 투표 실시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술적 준비의 한계로 구현되지는 못하다가 1992년에야 도입되었다. 이후 시각장애인들은 비교적 일찍부터 학업에 집중하고 사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 중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은 세 명인데 모두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논어’ 위령공 편에는 공자가 시각장애인 악사 면(冕)을 만나서 자리를 안내하는 장면이 나온다. 공자는 시각장애인이 어색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과 자리에 어울릴 수 있도록 “여기에는 섬돌이 있고, 아무개는 여기 있고 아무개는 여기 있소”라고 세세히 말해 주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지 않고 어울려 사는 전통은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급변하는 근대 사회에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도록 박두성 선생이 만든 ‘훈맹정음’과 관련한 유물들이 현재 문화재청에 의해 근대문화재로 등록 예고되었다. 우리는 이런 풍부한 역사를 새로운 공공 역사로 발굴하고 기억해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와 문화가 우리 사회에 튼튼히 뿌리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