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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5월 25일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계엄당국은 조건을 들어주지 않았다
송기숙은 한계를 절감했다
그렇다고 결사항쟁 할 수는 없고 …
이제 딴 사람 행동을 책임질 수 없다
각자 주장대로 하는 것이 최선일 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윤상원과 김종배가 만나
2020년 04월 23일(목) 00:00
<삽화 이정기>
어느 새 도청 광장의 궐기대회는 녹두서점을 출입하는 들불야학 강학이나 극단 광대 회원들이 주도했다. 무기회수를 하며 계엄사 측과 협상을 해온 도청 안의 일부 학생수습위원과 시민수습위원들이 불만을 드러냈지만 궐기대회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학생수습위원회 위원장 김창길과 목사 한 명이 녹두서점에서 나온 운동권 제적생을 찾아와 부탁하기도 했다.

“선배님, 궐기대회는 시민덜을 흥분시킬 뿐인께 중단허는 것이 으쩌겄습니까?”

“안 되네. 내게 그런 권리가 ?네. 근디 으째서 도청 안 사람들 맘대로 무기를 반납허는가? 오늘 낼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첩보가 난무헌디 맨손으로 싸우라는 말인가?”

“긍께 협상허고 있는 거 아닙니까? 저는 또 상무대로 갈 겁니다. 으쨌든 계엄군 진입은 막아야 허는 거 아닙니까?”

“자신이 있으믄 궐기대회에 나와서 입장을 밝히게. 자신이 ?으믄 자네덜이 도청에서 나가든지. 우리가 도청을 지킬 것인께.”

“선배님, 시민덜을 을매나 더 희생시킬라고 그랍니까? 시민군이 계엄군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이길 수 있다믄 방법을 알려주씨요. 그라믄 우리도 총을 들겄습니다.”

“협상은 결렬될 것이네. 여그까지 옴서 희생헌 시민은 뭣인가? 죽드라도 함께 싸우는 것이 희생당한 시민을 위한 도리가 아니겄는가.”

김창길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계엄군이 또 다시 시내로 진입한다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시민수습위원들은 비를 조금씩 맞은 채 YWCA 2층 총무실로 하나 둘 들어왔다. 한 수습위원이 쓸쓸하게 말했다.

“날씨마저 우릴 도와주지 않는그만.”

“우리와 소통해 온 김 장군도 벨 수 ?는갑소. 전두환이가 쥐락펴락허고 있으니.”

우려한 대로 계엄사 측은 갈수록 강경해졌다. 융통성이 있어 보이던 김기석 소장마저 이제는 모든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수습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YWCA 총무실에는 비가 내리는 데도 홍남순, 이기홍, 조아라, 명노근, 윤영규, 박석무, 장두석 등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종교계 인사들이었다. 앞으로는 더 이상 회의나 협상만 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침에 도청에서 일어난 독침사건으로 시민군들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어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은 시도 때도 없이 나돌았다.

송기숙은 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YWCA로 나섰다. 택시를 잡을 수 없었다. 계림극장까지 가는 동안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좀 전까지 비가 쏟아진 탓도 있었지만 계엄군이 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피난을 가버린 듯도 했다. 계림극장을 조금 지나자 철물가게 주인이 담배를 문 채 셔터 문을 손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담배 가게가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송기숙은 어제부터 담배를 피우지 못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송기숙은 염치불구하고 말했다.

“담배 한 가치만 빌립시다.”

“도청에 가믄 노나준다고 헙디다만 나는 해당이 안 되겄지라.”

시민군에게는 담배를 지급했다. 보통사람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가게주인은 담배 갑을 꺼내더니 한 개비만 주는 것이 아니라 두 개비를 주었다. 가게주인의 담배 갑을 보니 빈 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두 개비를 주는 것에 송기숙은 감동했다.

“아이고, 한 개비만 줘도 되요.”

“시국이 요럴 땐 콩 반쪽이라도 노나묵어야지라.”

송기숙은 YWCA로 가는 동안 내내 가게주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콩 반쪽이라도 나누어먹는 것’이 시민의 본래마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러 동네에서 쌀과 반찬, 주먹밥이 나왔을 터였다. 어려울수록 드러나는 시민들의 선한 마음이었다.

YWCA 총무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송기숙은 늦게 나와 입을 다물고 지금까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살폈다. 처음 본 30대 초반의 젊은 사람도 있었다. 보성기업 영업부장이라는 전남대 제적생 출신인 정상용이었다. 정상용은 계엄사 측과 협상하기보다는 무장 항쟁으로 선회하자고 시민수습위원들을 설득했다.

“계엄당국이 우리의 수습조건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 ?지 않겄습니까? 여러 어르신들께서 항쟁하자는 우리를 지지해 주십씨요. 그동안 수배 때문에 도피해 있던 저의 선후배덜이 속속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희생당헌 광주시민들 죽음을 헛되게 허지 않겄다는 열정은 알겄네. 허지만 계엄군과 싸운다는 건 개죽음밖에 안되네.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계엄당국과 계속 협상을 하면서 우리 주장을 관철해 나가겄네. 이 방법 말고는 무슨 신통한 묘수가 있겄는가.”

“계엄군이 다시 들어온다고 하는디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습니다. 회수헌 무기를 다시 시민군에게 나누어주고 도청 사수부대를 조직하여 최후항전을 준비해야 헙니다.”

정상용의 주장에 동조하는 시민수습위원들은 거의 없었다. 찬성하는 인사는 이성학 장로뿐이었다. 김성용 신부가 참석했으면 찬성할 텐데, 그는 지금 남동성당에 있었다. 윤공희 대주교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를 받고 남동성당으로 와 있기 때문이었다. YWCA에 모인 시민수습위원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도청에서 다시 오후회의를 갖기로 하고 헤어졌다.

오후가 되자, 도청 분수대 궐기대회는 예정대로 들불야학 강학들의 주도로 어제처럼 시작했다. 대회 이름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로 바꾸어 성격을 분명히 했다. 박남선은 시민군 대표로 분수대 위에 올라서 윤상원에게 부탁한 원고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를 그대로 호소하듯 읽었다.

“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박남선은 시민들 못지않게 자신도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다. 시민들은 다 알고 있는 시위과정을 이야기할 때도 박수를 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박남선은 분수대 위에서 시민들을 내려다보는 자신이 시민들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도입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도입니까?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허위사실을 날조, 유포하는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박남선이 분수대에서 내려오자 시민대표로 윤강옥이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는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을 낭독했고, 박효선이 계엄군에게 끝까지 맞서 광주를 지키자고 짧게 연설했다. 유석은 이 날도 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방석모를 쓴 불교학생회 선배 김동수를 만나 인사를 했다. 대회가 끝날 무렵 또 비가 내리자 원각사로 갔다가 산수동 집으로 돌아왔다. 나주에서 올라온 김기광은 도청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궐기대회 가 끝난 뒤 일부 대학생들은 YWCA로 모이라는 방송을 듣고 갔는데 위성삼도 그 무리에 끼었다. 그런데 YWCA에서는 학생증을 갖고 있지 않은 대학생은 돌려보냈다. 위성삼은 머리가 긴 여자에게 학생증을 보여주고는 YWCA 강당으로 들어갔다. 학생증 때문인지 강당에 모인 학생은 막상 3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편, 오전에 회의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헤어진 시민수습위원들이 오후 늦게 다시 부지사실로 모였다. 무기회수를 주장하는 장휴동, 장세휴 목사, 뒤늦게 얼굴을 내민 교수, 일부 학생수습위원들이 회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윤상원이 상황실로 허둥지둥 뛰어 들어와 박남선에게 소리쳤다.

“큰일 났소! 시민수습위원덜이 무조건 무기반환을 결의해부렀소.”

박남선은 지금까지 참았던 울분이 치솟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총을 든 시민군 20명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엠16소총을 든 시민군은 문에 배치하고 나머지 시민군은 복도에 대기시켰다.

“내 지시가 떨어지믄 전부 사살해버려!”

박남선은 군홧발로 문을 차고 부지사실로 들어갔다. 부지사실에는 광주지역의 종교계 인사와 정치인, 목사 등 무기회수를 주장해온 시민수습위원 및 독립지사 최한영 선생, 정시채 부지사 등이 모두 모여 있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어든 박남선이 총구를 천정으로 향했다가 천천히 수습위원들에게 겨누었다.

“누구 맘대로 무기반납을 결의해부렀소?”

부지사실은 공기가 살벌하게 돌변했다. 수습위원들 가운데 어떤 인사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박남선은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이제까지 죽어간 시민덜 피를 배반허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다시 지껄이믄 다 죽여버릴 것이요!”

그러자 김창길 편에 선 노수남이 일어나 박남선에게 다가와 말했다.

“시방 무슨 짓거린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끝내자는 말이 틀렸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믄 으쩌겄다는 것인가?”

박남선은 대범하게 꾸짖듯 말하는 노수남의 기를 꺾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권총을 그에게 겨누었다가 차마 쏘지는 못하고 권총손잡이로 그의 등을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그가 맥없이 픽 쓰러졌다. 박남선은 기세를 몰아 수습위원들을 다그쳤다.

“시민 전체 의사를 무시허고 계엄당국과 내통하여 무기를 반환허자는 놈이 있으믄 모두 죽여버릴 테니 생각이 다르다믄 도청을 떠나씨요!”

김종배도 박남선을 거들었다.

“학생덜이 얼굴을 모르는 교수가 무슨 교숩니까? 과거 유신정권 때 빌붙어 살았던 종교인이 무슨 사태수습을 한답시고 얼쩡거립니까? 모두 나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소.”

잠시 후,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피해 실제로 낯선 교수와 한두 명의 목사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도청을 나갔다. 일부 학생수습위원들도 그들을 뒤따라나갔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김창길은 오후 6시쯤에 몹시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나 홍남순, 이기홍, 조아라 등의 수습위원들을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했다.

“도청 지하실에는 이리역 폭발사고의 몇 배가 되는 다이너마이트가 있습니다. 화순탄광에서 갖다 놓았는디 폭발허믄 4킬로미터 이내는 잿더미가 돼불 것입니다. 이를 지키느라고 3일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인자 인원이 부족해서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언제 첩자들이 들어와 폭발시킬지 모릅니다. 어르신들이 지켜주셔야 헙니다.”

홍남순, 이기홍은 물론 국군통합병원에서 도청으로 돌아온 조비오 신부와 남동성당에서 온 김성용, 정규완 신부도 김창길의 제안에 동감했다. 교회와 성당에서 믿을 수 있는 청년신도들을 데리고 와 도청 지하실을 지키기로 즉석에서 결의했다.

오후 7시쯤, 도청 식산국장실에서는 윤상원과 정상용, 김영철, 박효선, 이양현, 정해직 등 YWCA에서 온 사람들이 김창길 대신 김종배를 내새워 강경하게 대처해 나가자고 입을 모았다. 기존의 학생수습위원회가 와해되어가자, 김창길은 송기숙을 찾아와 하소연했다.

“교수님, 더 이상 못해묵겄습니다. 계엄군이 쳐들어오믄 민원실 식당에서 봉사허는 여자 분덜이나 고등학생 시민군덜이 몬자 피해를 볼 것입니다. 그들에게 도청을 떠나라고 헌 뒤 저도 나가겄습니다.”

“이제 자네가 알아서 행동할 수밖에 없네. 누구도 딴 사람의 행동을 책임질 수는 없네.”

시계를 보니 9시였다. 송기숙은 명노근과 함께 도청을 나와 동구청 뒤편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에게 줄 과자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터벅터벅 걸었다. 그때 한 학생이 뛰어와 YWCA 강당에 학생들이 모여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송기숙은 그 학생에게도 도청에서와 같이 “계엄당국이 우리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각자 알아서 행동하게.”라고 말한 후 귀가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송기숙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교수로서 한계를 절감했다. 정상용의 주장이나 김성용 신부의 논리대로 계엄군에게 결사항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각자의 주장대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었다. 실제로 식산국장실에서는 윤상원과 김종배가 만나 김창길의 학생수습위원회를 대신해서 새롭게 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위원장 김종배, 내무담당 부위원장 허규정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박남선, 기획실장 김영철, 기획위원 이양현, 기획위원 윤강옥, 홍보부장 박효선, 민원실장 정해직, 조사부장 김준봉, 보급부장 구성주’

밤 10시 무렵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김창길은 민원실 자원봉사자와 도청 안을 지키는 시민군들에게 계엄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떠날 사람은 지금 나가라고 설득하며 다녔다. 이윽고 그는 빗속으로 사라지듯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손을 뗐다. 김창길이 소파를 잠자리 삼아 쓸쓸하게 누운 뒤 신부와 목사들은 청년신도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도청을 나섰다.

그러나 목사와 신부들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YWCA에 있던 학생 50여 명이 비를 맞으면서 도청 지하실의 다이너마이트를 지키기 위해 들어왔다. 이기홍 변호사실 사무장 위인백은 빗속을 걸어온 학생들이야말로 하느님이라고 울컥했다. 학생들은 도청 현관에서 총기 다루는 훈련을 반복해서 받았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조비오 신부가 청년신도 12명을 데려 왔으며 자정이 임박해서는 김성용 신부가 청년신도 3명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정규완 신부는 배탈이 나서 못 오고 인편에 청년신도 1명을 보냈다. 그런데 목사들은 끝내 오지 않았다. 청년신도들과 함께 폭발물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목사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