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5월 25일 ‘신부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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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5월 25일 ‘신부님의 눈물’
조비오 신부가 나직하게 말했다.
“무기를 반납허는 조건으로
계엄당국과 협상허고 있네.
이러는 우리도 슬프고 분통터지기는
자네덜 심정과 마찬가지네.
계엄군이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디
시민의 희생을 막을라믄
2020년 04월 09일(목) 00:00
<삽화 이정기>
도청을 중심으로 화정동, 농성동, 광천동, 동운동, 계림동, 산수동, 학운동, 지원동 등은 광주 외곽 동네였다. 조비오 신부는 무기회수반 차를 타고 외곽 지역을 돌았다. 지역을 방어하는 시민군이 있을 때는 차를 멀찌감치 세워놓고 걸어갔다. 캄캄한 밤중에는 오인사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조비오 신부를 안내하고 있던 무기회수반 시민군이 말했다.

“신부님, 자정이 넘어부렀습니다. 인자 성당으로 돌아가서 주무시지라우.”

“계엄군이 다시 진입헌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디 어처께 잠을 잘 수 있겄는가. 회수허는 데까지 심껏 해보세.”

“잘허믄 4천 자루는 회수할 거 같습니다.”

“그거밖에 안되는가?”

어제까지 회수된 총기가 3500여 정이니 오늘까지 5백 정을 채우면 일단 목표는 달성할 것 같다는 시민군의 대답이었다.

“나는 발이 붓고 물집이 생겨 서 있기도 심이 드네.”

“인자 우리덜에게 ?기고 들어가시지라우.”

“시민덜이 또 희생당헐 판이라 맘이 조매조매허네.”

무기회수반 차는 고속도로 입구에서 바로 산수동오거리로 갔다. 교도소와 고속도로입구 쪽에 있는 시민군들을 설득하여 총기를 회수하고 가는 길이었다. 조비오 신부는 무기회수반 차를 한쪽에 세우게 한 뒤 웅성거리고 있는 산수동 시민군에게 다가갔다. 불미스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므로 수습위원 일행은 차에 남고 무기회수반 시민군이 조 신부를 양쪽에서 호위했다. 예상했던 대로 거친 말이 날아왔다. 시민군이 총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이 새끼덜은 뭐야!”

“신부님이요.”

“뭣하러 왔소?”

“총기를 회수하러 왔소.”

총을 들이댔던 시민군이 총구를 내리며 물었다.

“죽은 우리 선후배, 친구덜 목심의 대가를 어처께 보상할라고 그러요?”

조비오 신부가 나직하게 말했다.

“무기를 반납허는 조건으로 계엄당국과 협상허고 있네. 이러는 우리도 슬프고 분통터지기는 자네덜 심정과 마찬가지네. 계엄군이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디 시민의 희생을 막을라믄 이 방법밖에 ?지 않겄는가. 억울해도 으쩌겄는가.”

조비오 신부는 변두리의 시민군을 만날 때마다 했던 말을 또 되풀이했다. 그러나 산수동 시민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신부님, 고로코름 목심이 아깝습니까?”

“내 목숨이 아깝다는 말이 아니네.”

“선후배덜이 죽었는디 우리만 살아서 뭣허겄습니까?”

조비오 신부는 선후배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시민군이 대견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살상만행을 생각하자 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아 눈물이 나왔다. 일행 중에 이종기 변호사가 항변하는 시민군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그가 어제 저녁부터 식량보급차가 오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다.

“식량보급차가 안 와서 쫄쫄 굶고 있그만이라우.”

“도청으로 가서 보내도록 하겄네.”

이윽고 산수동 시민군들이 소총 열댓 자루를 넘겨주었다. 조비오 신부 일행은 동명동 지름길을 이용해 도청에 들어가서 급히 빵과 우유를 싣고 다시 외곽 변두리 쪽으로 돌았다. 계엄군에게 사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헤드라이트를 끈 채 달렸다. 새벽 3시가 지나서까지 남재희 신부, 장세균 목사, 이종기 변호사가 함께 했다. 시민군들의 호응은 어디서나 차가웠다. 무등경기장 부근에서는 지역방어 시민군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시민군이 총기회수를 설득하는 수습위원들의 자격을 따졌다.

“당신덜은 누구요?”

“우리는 시민대표 수습위원이네.”

“시민대표라고 누가 인정했소?”

“계엄당국과 협상할라믄 대표가 있어야 헐 거 아닌가.”

“총을 반납허믄 영령덜 피의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소?”

“아직은 모르네.”

“광주시민 피의 대가를 받기 전에는 무기를 내놓을 수 ?소.”

시민군의 논리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보장’과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오히려 확실한 ‘보장’과 ‘대가’ 없이 시민군을 설득하고 있는 조비오 신부는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계엄군이 무력진압을 강행할 분위기인데 총기회수가 늦어지면 충정과 정열로 총을 든 시민군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의 피해가 너무도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비오 신부는 논리적인 말보다 감성적으로 호소했다.

“우리는 목사이고 신부네, 우리도 죽음을 무릅쓰고 부모 같은 마음으로 나섰다는 것을 알아주게. 오로지 광주시민의 희생을 줄이고자 이러는 것이네. 제발 우리를 믿어주시게.”

이윽고 시민군끼리 찬반 토론을 벌이더니 몇 명이 총기를 반납했다. 조비오 신부 일행을 태운 소형버스는 또 다시 국군통합병원 쪽으로 달렸다. 계엄군 장갑차가 보이는 대치지역으로 시민군 독립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시민군 소대장은 예비군 출신이었고 시민군들은 대부분 십대 후반의 넝마주이나 구두닦이 청년, 고아들이었다. 시민군들은 버스 1대를 엄폐물로 삼아 방어하고 있었다. 어린 시민군이 조비오 신부 일행을 보자 비아냥거렸다.

“또 왔소? 배고픈께 빵이나 좀 주쑈.”

빵과 우유를 박스째 내려준 뒤 조비오 신부가 말했다.

“대부분 총기를 반납했네. 여기 시민군만 반납허믄 우리가 자신 있게 협상헐 수 있네.”

평소에 소외받고 살았던 어린 시민군이 더욱 단호했다.

“우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요. 무기반납은 절대로 못헙니다요. 수습이 되믄 우리는 끌려가 죽을지 모른당께요.”

“죽기는 왜 죽어. 협상은 으째서 허겄는가. 보복허지 말라고 협상허는 것이제.”

“총을 주믄 보복허지 않는다고라?”

시민군의 단호한 태도 뒤에는 불안함도 숨어 있었다. 조비오 신부는 어린 시민군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세.”

조비오 신부와 수습위원 일행이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통사정했다. 일행 중에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시민군 소대장이 결론을 내렸다.

“도청으로 철수허되 총기반납은 허지 않겄소.”

어느 새 무등산 쪽 하늘에 먼동이 트고 있었다. 수습위원 일행은 외곽지역을 두세 번씩 돌아다니며 밤을 새워버린 셈이었다. 조비오 신부는 서 있기도 힘들었다. 발등이 퉁퉁 부어 걷기가 고통스러웠다.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 바늘로 콕콕 찌르듯 아팠다. 어린 시민군들은 도청에 들어와서 벽에 기댄 채 쉬면서도 총을 가슴에 품고 놓지 않았다. 믿을 것은 총밖에 없다는 모습이었다. 새벽공기는 싸늘했다. 조 신부는 얇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을 보자 새삼 마음이 짠했다. 도청에 남아 있던 수습위원인 이성학 장로가 말했다.

“날씨가 쌀쌀허니 돈을 모아 시민군덜에게 내의라도 사줍시다.”

윤영규 선생이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시민수습위원들이 먼저 지갑을 열었다. 학생수습위원들도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모자에 넣었다. 이른 새벽에 갑자기 모금했기 때문에 걷힌 돈은 많지 않았다. 윤영규 선생은 시민군 소대장에게 돈을 건네주고 나서 시민군들을 데리고 민원실 식당으로 갔다. 여성 자원봉사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시민군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날랐다. 김치와 멸치조림, 갈치속젓은 이미 식탁에 놓여 있었다. 시민군들은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따땃헌 국밥이라서 눈물이 나부네.”

굶주렸던 배를 채운 시민군들은 갑자기 유순해졌다. 절대로 반납하지 않겠다던 총을 도청 정문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내놓았다. 일부는 학생이 많은 도청에 있기가 거북한 듯 정문을 빠져나갔다.

“공원으로 가불라요.”

나머지 70여 명은 도청 경비로 남았다. 조비오 신부는 3일 동안 변두리를 돌면서 4천여 정의 무기를 회수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회수한 총으로 연행자를 석방하고 계엄군의 재진입을 막고, 광주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협상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철없는 대학생을 만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학생은 미군함이 신군부를 견제하고 광주시민을 돕고자 부산항에 입항할 것이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들고 있었다.

“신부님, 미군함 코럴시호가 온답니다.”

“그래서 으쨌다는 건가?”

“미군이 오믄 신군부가 맘대로 못허겄지요.”

“정신 나간 소리 말게. 미군이 오믄 군부를 지원허지, 시민을 지원허겄는가? 쓰잘떼기?는 것에 희망을 걸면 안 되네.”

옆에 있던 시민군이 또 시비를 걸듯 말했다.

“궐기대회에서 들었는디 계엄군이 수습위원을 가지고 논다고 허대요. 긍께 어용 수습위원이라는 소리를 듣지라.”

조비오 신부는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어용이믄 어느 놈을 위한 어용인가? 말해 보게!”

“계엄사를 위헌다는 말은 안 했그만요.”

조비오 신부가 소리치자 시민군이 입을 다물었다.

“시민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전념했는디 무슨 어용이란 말인가.”

“진전이 ?응께 답답해서 도는 말이겄지라.”

시민군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리자 그제야 어젯밤에 새로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이 된 황금선이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쫓아왔다.

“신부님, 싸가지?는 놈덜 땜시 죄송허그만요.”

황금선은 총기를 회수하자는 쪽의 시민군 간부였다.

“총을 들고 싸우자는 놈덜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덜이그만요.”

“나는 이상주의도 현실주의도 아니네. 다만, 신부로서 시민의 희생을 줄이자는 것이 내 생각의 전부일 뿐이네. 사람의 목숨이란 무엇허고도 바꿀 수 읎는 소중헌 생명이 아닌가.”

황금선이 학생수습위원들 간에 갈등을 솔직하게 말했다.

“김종배와 김창길이 자꼬 대립허고 있그만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이지라. 김종배는 ‘계엄사와 무조건 협상허믄 안 된다. 협상이란 동등한 입장에서 허는 것인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무기를 반납허믄 우리에게는 심이 읎어진다. 무기를 반납허믄 안 된다’는 입장이고, 김창길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무기를 회수해 반납허자’는 주장이그만요. 신부님, 제가 보기엔 김종배 의견은 현실허고 무자게 동떨어진 것 같아서 저는 김창길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그만요.”

조비오 신부는 도청을 나와 기진맥진한 채 계림동성당으로 갔다. 25일은 성심강림 대축일이므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3일 동안 도청에서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졸거나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잔 탓인지 사제복에서 쉰내가 났다. 땀에 전 사제복과 속옷을 그날그날 갈아입지 못했던 것이다.

조비오 신부는 계림동성당 사제관으로 들어가자마자 골아 떨어져버렸다. 코고는 소리가 사제관 밖에까지 들렸다. 사무장이 달려와 귀를 기울였을 정도였다. 한두 시간 깊은 새우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신부님, 미사 드릴 시간이에요. 신부님, 미사 드릴 시간이에요.”

조비오 신부는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은 파이프오르간이나 비올라 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달리 성당 안이 크고 높아 보였다.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그런지도 몰랐다. 신자들의 친인척 중에는 계엄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많을 터였다. 신자들의 어두운 표정에서 비통한 마음이 바로 읽혀졌다. 그는 먼저 윤공희 대주교가 보낸 성심강림 대축일 사목서한을 낭독했다. 그런 뒤 다음과 같은 요지로 강론했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계엄군이 무력으로 광주에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평화적이고 명예롭게 해결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드립시다. 나는 지금 수습위원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미약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조비오 신부는 강론 중에 눈물을 흘렸다. 신자들을 둘러보는 순간 갑자기 슬픔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수녀들과 함께 날마다 성체 앞에서 묵주신공을 하고 기도하는 신자들이었다. 눈물이 많기는 신자들도 조 신부 못지않았다. 저녁미사 때마다 광주시민의 피해소식을 들려주면 모두가 흐느끼다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미사 후, 조 신부는 윤공희 대주교가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남동성당으로 나갔다. 김수환 추기경이 희생당한 광주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성금수표를 장용복 군종신부 편에 은밀하게 보냈다는 전갈이 왔던 것이다. 윤공희 대주교가 조 신부를 보자마자 말했다.

“군종신부가 군용헬기를 타고 상무대에 왔어요. 조 신부님이 상무대를 내왕하고 있으니 추기경님의 메시지와 성금수표를 받아오시오.”

조비오 신부는 즉시 장용복 군종신부에게 전화를 해 국군통합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국군통합병원으로 갈 때는 교우인 오병문 교수와 동행했다. 두 사람은 농성동까지 걸어간 뒤 한 가게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국군통합병원으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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