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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남평과 안성현
2019년 12월 10일(화) 04:50
[김철성 전남도 남평과적검문소 주무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탈레스의 통찰이다. 남평 역시 드들강 물이 있어 형성된 도시다. ‘택리지’의 지리편을 보면, 집터를 잡으려면 수구가 꼭 닫힌 듯해야 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보아서 구해야 한다고 했다. 또 물은 재록(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고 말했다. 이 조건에 부합된 도시 중 하나가 바로 남평이다. 남쪽의 평평한 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남평은 행정구역상 나주시에 속한 하나의 읍이다. 현재 남평이라는 지명에서는 이 지역을 휘감아 도는 드들강(행정적 명칭은 지석천) 물과 관련된 그 어떠한 상징도 떠올릴 수 없다.

그러나 ‘물의 고장’ 남평의 역사를 조금만 들춰봐도 물과의 깊은 관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주시사’에 따르면, 남평은 본래 백제 시대에는 미동부리현, 고려시대에는 남평과 영평을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미동부리는 물이 차있는 들을 가진 마을이고, 영평은 물이 차있는 들이라 한다. 영평은 들판이 질척인다고 해서 ‘진들’이었는데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영평(永平)이 됐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만들어진 남평이라는 지명은 광주를 기준으로 해 남쪽의 평평한 들이라는 뜻이니, 당시는 광주 관할이었기는 하지만 지금의 남평 입장에서는 꼭 반가운 지명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남평의 생활 문화 속에 드들강의 물과 관련된 자취가 남아있다. 예컨대 남평 장날은 1일과 6일이다. 흔히 장날의 날짜는 오행 사상에 의해 정한다. 즉 그 지역의 산세가 구불구불한 물 흐름 모양의 수체(水體)면 1·6일, 영암 월출산처럼 뾰쪽뾰쪽한 불꽃같은 화체(火體)면 2·7일, 삼각형 모양의 목체(木體)면 3·8일,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인 금체(金體)면 4·9일, 끝으로 산봉우리가 네모 모양으로 평평한 토체(土體)면 5·10일이다.

남평 장날이 1·6일이면 주변에 수체인 산모양이 있어야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행여 강 건너 산줄기를 수체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풍수학에서 산이 없으면 물길로 대신하는 ‘수세정혈법’이라는 것도 있다. 드들강이란 물길이 곧 수체여서 정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또 남평은 강물을 농업 용수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장마철 범람 때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도 많았다. 그래서 물 조심 하자는 비보 풍수가 활용됐다. 그 자취는 현재 남평초교 왼쪽편의 동사리 당산의 당산제 형태로 잔존한다. 250여 년을 이어온 동사리 당산제는 입석이 주신으로 홍수 방지 등의 풍수 비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필자는 남평 드들강과 관련해서 한 분을 떠올렸다. 널리 알려진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와 벌교 부용산 입구에 세워진 노래비의 ‘부용산’에 곡을 붙인 월북 음악가 안성현(1920~2006)이다. 그는 남평에서 태어나 남평초교를 다녔다. 함흥으로 이사 가기 전인 16세까지 살면서 드들강을 놀이터 삼았던 것이다. 유년 정서는 평생을 간다고 했다. 드들강 유원지를 뛰놀았던 안성현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서 고향의 강변을 떠올렸을 것이다. 김소월의 시는 여기 남평 드들강에서 안성현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물(드들강)과 관련한 안성현의 집안 얘기를 해야겠다. 서두의 택리지에서 밝혔듯 물은 재물을 상징한다. 안성현이 대음악가로 성장하기까지는 집안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다. 게다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지 않았던가. 예나 지금이나 음악 공부는 비용이 만만찮다. ‘화첩기행’(김병종)을 보면, 남원이 일찍부터 소리 문화의 요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들과 물이 풍부해 먹고 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경 사회에서 배부르고 나면 풍류와 예를 찾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여기서 남원은 남평으로 바꿔도 뜻은 통한다. 안성현의 부친인 안기옥도 가야금 산조의 명인 아닌가. 결국 드들강의 풍부한 수량이 살기 좋은 남평과 안성현이라는 천재 음악가를 낳은 셈이다.

남평에서 만난 안성현을 통해 떠올랐던 것은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다. 현재 교착된 남북 관계의 물꼬를 틀수 있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민간인 문화 예술 교류가 아닐까. 그래서 김소월의 강변과 안성현의 강변에서 우리는 함께 큰 울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