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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알고 마시면 인생이 즐겁다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한잔 술, 한국의 맛 이현주 지음
2019년 11월 15일(금) 04:50
감홍로
지초로 붉은빛을 내는 진도홍주 제조 시연 장면






문배주






문배주






진도 홍주






대통대잎술






조선시대 함경도 홍원에 홍랑이라는 관기가 있었다. 홍랑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조선 천재시인 고죽 최경창. 그들의 인연은 과거에 급제한 최경창이 함경도 북평사로 파견되면서였다. 타향에서의 외로움과 타고난 문사였던 최경창은 문장과 재색을 갖춘 홍랑과 연정을 나눈다.

그러나 북평사 임기는 2년. 행복했던 순간들이 화살처럼 흘러가고, 홍랑은 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애절한 마음을 담은 시가 바로 ‘묏버들가’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그러나 얼마 후 최경창이 죽고 만다. 홍랑은 자신의 얼굴에 칼을 그어 상처를 내고 재를 바른다. 정절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얼마 후 왜란이 나자 그녀는 최경창의 문집을 몸에 지니고 도피를 하고, 세월이 흘러 문집은 오늘에까지 이른다.

그 홍랑의 묘가 있는 지역이 ‘감홍로’(甘紅露)라는 술이 전해지는 고장, 파주다. 달고 붉다는 뜻이 사뭇 시적이다. 무엇보다 조선의 여류시인 홍랑의 연정과 예술혼이 떠오른다. “반짝이는 연지 빛 한잔 술과 마주 앉은 여인의 붉은 옷고름에 동하는 춘심을 누를 풍류객이 몇이나 있었을까?”

술은 알고 마시면 인생이 즐겁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전통주 강연과 시음, 전시 행사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전통주 소믈리에 이현주 씨. 그녀가 펴낸 ‘한국 술, 한국의 맛’은 술 한잔이 가져다주는 다채로운 인생의 맛을 풀어낸다. SNS 상에서 ‘전통주 읽어주는 여자’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저자는 국가 주요 행사의 건배주와 다수의 호텔과 외식업체에 전통주을 추전하는 자문 활동을 해왔다.

책에는 전통주부터 신생 양조장들이 선보이는 전통주가 주를 이룬다. 그간 저자가 보고 듣고 마시고 느낀 증류주, 약주, 탁주 등 다양한 전통주에 대한 이야기다. ‘명인 안동소주’, ‘문배주’, ‘미르’, ‘대통대잎술 십오야’, ‘송화백일주’, ‘이강주’, ‘면천두견주’, ‘한산소곡주’ 등 각각의 전통주가 발하는 맛과 향은 그윽하다.

저자는 한국의 대표적인 앉은뱅이 술로 ‘한산소곡주’를 꼽는다. 아래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서천의 주막거리에서 마셨던 술이다. 시장기를 채우기 위해 마신 술이 그만 과거보러 갈 생각을 잊고 날을 세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맵거나 단맛이 있는 양념이 강한 음식에도 기죽지 않는 술이다. 밥과도 잘 어울려 소박한 나물 밥상에 반주로 곁들이기도 좋다”고 평한다.

담양의 ‘대통대잎술 십오야’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정자에 앉아 서걱이는 대잎 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그 맛에 대한 상찬이 이채롭다.

대나무통에 술을 넣어 숙성과정을 거쳤기에 깊은 맛이 난다. 쌀에 십여 가지 한약재를 넣어 발효했지만 약재의 향과 맛이 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발효된 술을 넣어 다시 숙성 과정을 거쳤기에 부드럽고 조화로운 맛이 난다는 얘기다.

전주의 이강주(梨薑酒)는 술에 들어가는 재료를 따서 명명된 이름이다. 배와 생강, 울금, 계피, 꿀도 중요한 재료다. 최남선은 그의 저서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에 유명한 널리 알려진 술 세 가지 중 하나로 거론한 술인 이강고가 바로 이강주의 혈통”이라고 설명한다. 이강고의 ‘고’(膏)는 고아낸다는 뜻으로 약재 등의 재료를 소주에 넣어 중탕해 만든 술을 일컫는다.

전통주 소개와 아울러 저자는 술 한 잔의 가치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술이란 마시고 취하는 매개가 아닌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와 연관돼 있다는 논리다. 거기에는 술을 빚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동의 과정을 존중하고 이해한다는 의미가 결부돼 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막걸리는 다 같은 맛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그간의 인식도 많이 바뀐 듯하다. 갓 걸러 신선한 상태로 마시는 술 막걸리는 병 속에서 무궁한 변화를 보이니 오늘 마신 이 막걸리 맛이 내일 같으리라는 법이 없다. 지금 마시는 이 술 한잔이 이 우주에서 유일한 맛을 가진 술이니 그 운명과의 조우에 집중한다면 술맛은 더 귀해진다.” <소담출판사·1만68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문학박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