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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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2025년 11월 28일(금) 00:20
어느 시절이나 전문가는 있었다. 매머드의 발자취를 찾아낸 뒤 절벽으로 몰아 추락사 시키는 사냥꾼은 부족을 먹여살리는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다.

고등학교 시절, 연습장에 수학 풀이와 영어 단어를 까맣게 써내려가는 ‘깜지’를 강제적으로 내야 했다. 애들은 시키지 않아도 깜지가 넘쳐나는 우등생의 연습장을 찢어냈고, 담임은 이를 막기 위해 전날 백지에 자신의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전문가는 위기의 순간, 귀밑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한다. 미술에 소질이 있던 한 친구가 매머드의 목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던 사냥꾼처럼 칼을 몇 번 휘두르더니 지우개에 담임의 도장 복사본을 새겼다. 전문가의 손길에는 평화가 뒤따른다. 아침마다 볼펜 서너 자루를 한 손에 쥐고 백지를 채워나가던 ‘탄지신공’과 그래프 몇 개로 대형 지도를 완성하는 ‘대동여지도 전법’이 사라졌고, 교실 앞에 길게 늘어 선 매타작 행렬도 자취를 감췄다.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밀고 탓에 지우개 도장은 교무실에 전시됐고, 전문가의 엉덩이는 교문 앞 능소화처럼 붉게 물들었다. 깜지가 싫은 탓도 있었지만 전문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교사의 안목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도장의 마법사는 이미 천부적인 재능이 발현됐지만 아무도 그의 ‘전문성’에 손을 내밀지 못했다. 매가 아니라 따뜻한 관심이 전해졌다면 그 아이는 적어도 동네 어귀의 도장집 정도는 충분히 차렸을 것인데.

광주에도 전문가들이 넘쳐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숱한 주역과 주인공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가 조성되면서 문화 전문가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각종 문화단체와 기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이들 전문가들은 벌떼처럼 나타난다. 복합쇼핑몰 3종 세트가 골목상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경제 전문가도 많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최근 호남의 많은 정치인들은 인공지능(AI) 전문가를 자처하고,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설명으로 밤을 샐 기세다. 정치권의 전문성은 법률과 정책, 예산으로 이어지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정치인의 전문성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지우개 도장’ 같은 것이기를 기원한다.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kro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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