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평등 - 김형중 조선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문도시광주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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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이후 새삼 ‘공정’(公正)이란 단어가 말썽이다. 나는 배움이 깊지 않아서 이 말의 정치학적 함의나 철학적 함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공평하고 올바름’이라는 정도의 사전적 정의로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공’(公)이란 글자의 의미에는 ‘공적인, 숨김없이 드러냄’이란 의미도 있고, ‘정’(正)이란 글자에는 ‘바로 잡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니,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참 윤리적이고 당위적이면서 수행적이기까지 하다. 훌륭한 단어다. 그 말을 발화하는 입의 주인이 그 의미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진정하고 거짓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말의 의미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시절의 영향을 받게 마련인바, 나는 이즈음 저 단어의 용례들을 주로 이런 데서 발견하곤 한다. ‘공정 거래’, ‘공정 무역’, ‘공정 선거’, ‘공정한 심사’, ‘공정한 기회’ 등등. 요컨대 이 단어는 이제 시장과 법의 영역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거나 특화된 듯하다. 시장과 법이라고 했거니와 양자의 공통점은 ‘몫을 두고 다툼’(계쟁)에 있다. 즉 계약이나 거래를 체결한 혹은 체결하려는 상대방이 있고, 그 상대방과의 계약이나 거래가 부당함 없이 성사되어 서로의 몫이 챙겨질 때, 우리는 ‘공정하다’라는 말을 쓴다. 애초에 보편적이고 인륜적이었던 ‘공정’이란 단어에 암묵적으로나마 ‘쌍방’, 즉 다른 대상과의 다툼과 비교가 조건이나 전제로서 자리 잡게 된 셈이다. 이제 ‘공정’은 ‘~~에 대해 공정함’, ‘~~에 비해 손해 보지 않음’의 의미가 되었다.
조국이 사면되었다. 그리고 다시 ‘공정’이란 말이 흔하게 눈에 띈다.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는 공정했는가? 조국의 사면은 공정한가? ‘공정’이란 말의 원래 의미에 따른다면 질문은 이런 의미여야 한다. ‘조국은 공평하고 올바르게 행동했는가?’ 반면 시장과 법의 언어에 따르면 질문은 이런 의미일 수 있다. ‘조국은 ~~에 대해 손해 보지 않았는가?’
전자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아마 조국 자신도 그렇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윤석열 일당의 법이 아무리 과도하게 집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티 없는 무죄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장과 법의 언어에 따른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분명 ‘다른 이들’과의 비교 속에서라면 그는 공정하게 취급받지 못했다. 비슷한 부류의 불공정했던 이들에 대한 다른 판례에 비할 때 과도하게 수사받았고 과도한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그 (비슷한 부류의) ‘다른 이들’이 문제다. 그와 비교 대상이 되는 그 ‘다른 이들’은 누구들인가? 모 정당의 전 대표, 모모 국회의원, 모모 장관 후보, 그러니까 강남의 부로 자식들 교육시키고 위조와 편법으로 ‘불공정’ 입시 비리를 저지른 자들, 조국의 ‘공정’은 그들과의 비교 속에서 시비가 붙고 그 여부가 가려진다. 공정하지 못했던 조국의 사면은 공정하다. 공정하지 못한 다른 이들의 불공정에 비해 그의 불공정 규모가 딱히 크다고 할 수 없으므로…….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현실 속에서 저런 논리는 많은 이들에 의해 주장되고 또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저런 논리를 금방 무색하게 만드는 단어가 하나 있다. ‘공정’보다 더 공정한 단어. 그것은 (원리로서의) ‘평등’이다. ‘평등’(平等)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권리·의무·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 ‘등’(等)이라는 글자의 의미에 ‘구분하다, 차별, 계급, 등급, 무리, 부류’란 의미도 있다는 사실 역시 강조해 두고 싶다. 그러니까 평등은 이즈음의 공정과는 달리 비교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어떤 무리나 부류 혹은 계급에 대해서만 비교를 허락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의 범위는 제한이 없고 무차별적이다. 시장과 법의 용어가 아니라 보편과 인륜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평등은 강남의 부자들이나 정치인이나 장관 후보자나 진보 정당 당수만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했던 시절을 우리는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로서 이루어진 어떤 상태를 지시하기보다는 고작해야 어떤 ‘원리’를 지칭한다고 해야 맞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단어는 아니다. 지켜져야 할 원리, 하지만 영원히 추구해야 할 원리, 그 원리 앞에서 오늘날의 ‘공정’이란 고작 ‘더 손해보지 않을 권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평등은 공정을 고발한다.
전자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아마 조국 자신도 그렇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윤석열 일당의 법이 아무리 과도하게 집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티 없는 무죄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장과 법의 언어에 따른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분명 ‘다른 이들’과의 비교 속에서라면 그는 공정하게 취급받지 못했다. 비슷한 부류의 불공정했던 이들에 대한 다른 판례에 비할 때 과도하게 수사받았고 과도한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그 (비슷한 부류의) ‘다른 이들’이 문제다. 그와 비교 대상이 되는 그 ‘다른 이들’은 누구들인가? 모 정당의 전 대표, 모모 국회의원, 모모 장관 후보, 그러니까 강남의 부로 자식들 교육시키고 위조와 편법으로 ‘불공정’ 입시 비리를 저지른 자들, 조국의 ‘공정’은 그들과의 비교 속에서 시비가 붙고 그 여부가 가려진다. 공정하지 못했던 조국의 사면은 공정하다. 공정하지 못한 다른 이들의 불공정에 비해 그의 불공정 규모가 딱히 크다고 할 수 없으므로…….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현실 속에서 저런 논리는 많은 이들에 의해 주장되고 또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저런 논리를 금방 무색하게 만드는 단어가 하나 있다. ‘공정’보다 더 공정한 단어. 그것은 (원리로서의) ‘평등’이다. ‘평등’(平等)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권리·의무·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 ‘등’(等)이라는 글자의 의미에 ‘구분하다, 차별, 계급, 등급, 무리, 부류’란 의미도 있다는 사실 역시 강조해 두고 싶다. 그러니까 평등은 이즈음의 공정과는 달리 비교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어떤 무리나 부류 혹은 계급에 대해서만 비교를 허락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의 범위는 제한이 없고 무차별적이다. 시장과 법의 용어가 아니라 보편과 인륜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평등은 강남의 부자들이나 정치인이나 장관 후보자나 진보 정당 당수만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했던 시절을 우리는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로서 이루어진 어떤 상태를 지시하기보다는 고작해야 어떤 ‘원리’를 지칭한다고 해야 맞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단어는 아니다. 지켜져야 할 원리, 하지만 영원히 추구해야 할 원리, 그 원리 앞에서 오늘날의 ‘공정’이란 고작 ‘더 손해보지 않을 권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평등은 공정을 고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