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다시 살아내기-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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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다시 살아내기- 김향남 수필가
2025년 07월 21일(월) 00:00
망설임 끝에 고무나무의 웃자란 가지를 잘라냈다. 너무 키만 커가는 게 위태로워 보여서였다. 잘린 가지에선 하얀 진액이 솟았다. 저도 생명임을 증명하듯 뚝뚝 피처럼 떨어졌다. 그 가지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위안 삼아 빈 화분에 심어두었다.

하지만 잘린 가지가 다시 살 수 있을까? 물을 줄 때마다 의심이 앞섰다. 줄기는 시들지 않았고 잎사귀도 그대로였지만, 그 멈춤이 오히려 완강한 저항처럼 느껴졌다.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잎이 마르지 않는다는 건, 적어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보이지는 않으나 필사적으로 살기를 도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안간힘이 더 깊은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일지도….

그러나 아무 변화도 없는 가지에 물을 주고 싹이 트길 기다린다는 건 생각보다 지루한 일이었다. 멈춘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살아 있으라고, 다시 살아나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괜한 희망을 품고 있는 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내 위안을 위한 욕심은 아닐까?

그렇게 석 달쯤 지났을까. 어느 아침, 뭔가 쑥 커져 있는 게 느껴졌다. 잎과 잎 사이 작은 가시처럼 돋아 있던 부분이 여느 때와는 달라 보인 것이다. 그건 틀림없이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마침내 뿌리를 내렸다는 뜻이었다. 멈춘 듯 보였으나 안에서는 치열한 생의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기다리지 못하고 뽑아버렸으면 어쩔 뻔했나! 밋밋한 아침이 순식간에 벅찬 환희로 차올랐다. 보고 또 보고, 찍고 또 찍으며 흐뭇한 하루를 시작했다.

물론 이런 경험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죽었다고 밀쳐두었던 화분에서 보란 듯 싹이 돋는 것을 본 적도 있고, 땡볕에 던져진 쇠비름이 잠깐 내린 비에도 불끈 기운을 차리던 것도 생생히 기억한다. 다육이는 무엇보다 쉽게 꺾이지만, 꺾인 자리에 다시 생을 이어갔다. 몇 해 전에 들여온 꽃기린 한 분은 지금 다섯으로 불어났다.

식물은 보통 씨앗으로 번식하지만, 떨어진 잎이나 가지를 통해서도 다시 생을 이어간다. 공중(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으니 씨 뿌릴 일은 거의 없고, 간혹 가지를 자르거나 옮겨 심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그 과정에 뜻밖의 기쁨이 있다. 씨 뿌릴 땅이 없다고, 비좁은 화분 속이라고 구태여 가리지 않고 더 크고 더 은밀하게 내리는 자연의 선물이다.

초목의 수형을 정돈하고 생장을 조절하며 새로운 개체를 유도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은 잘라내는 것이다. ‘잘라냄’은 단순한 제거가 아니라 회복과 증식의 출발점이 된다. 끊어지고, 고립되고, 다시 뿌리내리는 시간. 분리와 단절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얻을 수 있는 회복과 갱생의 기회다. 잿더미가 된 숲도 남은 뿌리와 줄기로 새로이 녹색의 숨결을 틔우지 않던가.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관계의 단절, 믿음의 상실, 꿈의 좌절 같은 인생의 ‘잘림’은 견디기 힘들지만, 그 고통은 때때로 변화의 문턱이 된다. 줄기를 자른 자리에 남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가 되고, 그 자리에 다시 뿌리가 돋는다. 실연 후의 침묵, 이직 후의 공백, 상실 후의 고요 같은 시간은, 그 자체로 성장의 자궁이 된다.

대나무는 뿌리를 사방으로 뻗는 데 수년을 보낸다고 한다. 겉으론 아무 일도 없어 보이지만, 땅 아래에서는 조용하고도 치열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충분한 기다림 끝에야, 어느 날 문득 쑥 솟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 흙 속에서, 빛을 향한 의지를 잃지 않고 숨을 고르던 시간. 그 어둠을 견디고 나서야 대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곧고 푸르게 자란다.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유연함, 한 줄기 빛에도 반응하는 생의 민감함은 모두 그 오랜 침묵의 결과다.

삶은 때때로 우리를 멈춰 세우고, 뚝 끊어놓고, 침묵 속에 머무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기 위한 시작이다. 단절은 소멸이 아니라 생의 또 다른 준비이고,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생명이 스스로를 다듬는 고요한 시간이다. 뿌리를 잃고도 다시 뿌리 내리는 식물들처럼, 인간도 상실과 고립의 시간을 지나며 스스로를 다시 세워간다.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생을 지속하려는 묵묵한 의지다.

삶은 그렇게 다시 살아내는 방식으로 계속되는 것임을 저 새잎에서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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