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만 파는 곳 아닌 일상 나누는 곳…시골마을 ‘건강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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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만 파는 곳 아닌 일상 나누는 곳…시골마을 ‘건강 사랑방’
‘한밤의 119’ 공공심야약국 <상> 구례 온종일 들여다보니
심야시간 다양한 손님 찾아와
응급상황 큰 도움 “고마운 약국”
차·커피 마시며 정겨운 담소도
전남 11개 시·군서 12곳 운영
지원금 줘도 운영 약국 드물어
2025년 06월 29일(일) 20:30
구례군 구례읍의 공공심야약국 ‘광주약국’에서 지난 27일 밤 9시께 손님들이 약을 구입하고 있다.
심야 시간에 전문가 상담과 함께 의약품을 안전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운영되는 공공심야약국. 밤에 급하게 약이 필요한 지역민들에게는 119나 다름없는 곳이다. 하지만 지원금을 줘도 운영 약국을 찾기 힘들다. 고령화가 심한 전남의 경우 약을 파는 편의점 찾기도 어려워 절실한 공간이지만 없는 곳도 많고 지속적으로 유지될 지도 미지수다. 필수 시설인 전남 공공심야약국을 찾아가 세 차례에 걸쳐 짚어보고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실효성을 높일 방안을 고민해본다.

지난 27일 밤 9시께 구례의 한 공공심야약국에 손님 이모(여·81)씨가 찾아오자, 약사 이성규(59)씨는 환한 얼굴로 손님과 함께 벤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성규 약사가 “어머님, 요즘 빨리 걷는 운동을 해야 한다.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하자 이씨는 허허 웃으며 “요즘 기력이 없다 싶었는데, 말씀대로 운동을 더 해야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약국 단골 손님이자 이웃 주민인 이씨는 이곳 약국에 수십년 인연을 맺어온 덕에 서로의 가정사와 몸 상태,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주치의 친구’ 같았다.

특히 올해부터 이 약사가 공공심야약국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밤중에도 옴서감서 안부를 나누곤 한다는 것.

이씨는 “이 약국 없으면 급할 때 상담도 못하고 어떻게 약을 사겠냐. 누가 잠 안 자고 11시까지 문을 열어주냐.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곳 공공심야약국은 다른 약국과 달리 밤 11시까지 문을 여는 약국이다.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범위 중 3시간씩, 연중무휴다. 정부와 전남도 등으로부터 운영비 등을 지원받기는 하지만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다.

공공심야약국은 단순히 약을 살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약국은 지역민들이 서로의 따뜻한 일상을 나누는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공공심야약국 ‘광주약국’ 앞에서 지난 27일 밤 약사 이성규씨가 손님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날 오전부터 약국을 찾아온 손님들은 80~90%가 어르신들. 약사 이씨와 안면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처방전 약을 타가거나 파스 한뭉치, 소독약, 청심환 등 상비약을 구입해가면서도 약사와 안부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폭염특보가 처음 발표된 이날은 더위를 피해 물과 커피를 마시고 가는 사랑방 같은 곳, 시장에 들렀다 지인들과 만나는 ‘만남의 장소’ 역할도 했다.

“어머니, 병원 다녀오셨나”, “오랜만에 오셨네. 이 약 가져가셔 한 번 드셔봐.”

약국 손님들에게 약만 파는 건 아니었다.

커피값이라면서 자두 한 봉지를 건네고 약국에 있는 TV를 시청하는 손님들, 약을 구매하고 바로 드시는 어르신에게 물 한잔 건네는 세심함, 점심 먹고 오는 길에 위장약, 혈압약 등을 사러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구례 피아골에서 버스로 30분 걸려 약국에 온다는 김규용(59)씨는 어머니 뇌경색 약과 위장약을 타러 오는 단골 손님이다. 김씨는 약국 직원과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김 씨는 “약사와 직원이 아니라 말동무가 되어주는 친구 같다. 믿고 약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약국의 활기는 인근 술집을 제외한 가게들의 불이 다 꺼진 밤중에도 이어졌다. 인근 약국들이 병원 문을 닫는 오후 6시께에 맞춰 셔터를 내린 반면, 이 약국은 환하게 불을 켜둔 채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이날만 해도 순천 치과를 다녀온 후 처방전을 갖고 온 손님, 벌에 쏘인 알레르기로 응급실을 다녀온 손님, 갑자기 아픈 아이를 위해 달려온 손님 등 10여명이 야간 시간대 약국을 찾아왔다.

구례 문척면에서 약을 사려고 10분 운전해서 온 손경준(63)·류미란(여·61)부부는 “낮에 일하다 오면 약국 못 오는 상황도 많은데 시골에 늦게까지 여는 약국이 있어 참 감사하다. 밤에 반갑게 찾아왔던 약국이라서 낮에도 이 곳에 오게 된다”고 말했다.

벌에 쏘여 응급실을 다녀온 주민 이모(44)씨는 “응급실에는 약을 살 수 없어 처방전을 갖고 약국에 왔다”며 “집에서 아이들이 배 아프거나 해열제가 필요할 때 심야약국을 이용했다. 주민으로서 밤중에 이용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하고 너무 좋다. 여러 약국에서도 운영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약사는 올해부터 처음 공공심야약국을 시작했다. 매번 심야약국에 관심도 많고 신청하고 싶었지만 연중무휴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는 부담이 커 미루다가 올해 운영해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특히 낮에는 직장일, 농사 때문에 약 사는 것을 놓친 지역민들이 밤에 와서 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지역민들에게 ‘항상 열려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밤에 문이 열려있으면 손님들이 정말 반가워하고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해요. 급할 때 응급실은 부담이 되는데 약국에서 손쉽게 약을 상담받고 살 수 있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되고 즐겁습니다.”

공공심야약국은 현재 전남 22개 시·군 중 단 11개 시·군, 약국 수로는 12곳에서만 운영되고 있다.

전남은 목포, 여수, 순천, 나주, 광양, 구례(요일별 나눠 2곳 운영), 고흥, 보성, 영암, 무안, 신안 등 11개 시·군에서 운영 중이다. 화순, 강진, 해남, 장흥, 진도, 담양, 곡성, 함평, 영광, 완도, 장성 등 11곳은 공공심야약국을 운영하지 않는다.

정부는 2022년부터 공공심야약국 제도를 시행해왔고, 작년까지는 도와 시·군비 등 자체 사업비로 운영을 해오다 올해부터는 약사법이 개정돼 국비 50%를 지원하고 있다.

다만 지원금을 줘도 공공심야약국을 운영하겠다는 약사들이 없고, 지자체에서는 급할 경우 응급실에서 치료받을 수 있고, 지원하는 약사가 없어 구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시골 주민들은 내년에도 밤에 약을 사러 갈 수 있을까.

/구례=글·사진 양재희 기자 heestory@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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