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장미꽃은 흐드러지고 -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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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장미꽃은 흐드러지고 - 장석주 시인
2025년 06월 13일(금) 00:00
우리 시름을 덜어주던 모란과 작약꽃이 지고 나니, 이웃집 담에 걸린 6월의 장미꽃이 보기 좋게 흐드러졌다. 붉은 장미꽃은 눈에 시리도록 탐스럽고 아름답다. 이 계절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죽고 사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불가피하게 겪는 숙명이니 이걸로 누군가와 드잡이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5월에 손아래 누이가 세상을 떴다. 한 배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태어난 오남매 중 손아래 누이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조카의 연락을 받고 요양병원에 있던 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누이는 편안해보였는데, 놀란 것은 누이가 외할머니와 판박이처럼 닮아서다. 병상에 누운 외할머니가 일어나 잘 왔다고 내 등이라도 두드릴 것만 같았다.

누이는 이태 전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힘들게 투병을 하다가 내게 유서라고 할 만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오빠, 나 먼저 가. 오빠는 천천히 있다가 와”. 누이는 그렇게 적었다. 죽음을 앞두고 볼펜을 쥘 힘조차 없었을 텐데 온몸을 쥐어짜 몇 자를 적었을 테다. 그 쪽지를 조카에게 건네받아 읽을 때는 눈물을 꾹 참았는데, 육개장 국물을 플라스틱 수저로 뜨다가 눈물 몇 방울이 후두두 벌건 국물로 떨어졌다. 나는 살아 있음으로 육개장 국물이 짠지 싱거운 지도 모른 채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누이의 장례 뒤 새벽에 오줌을 누러 일어났다가 고요한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아내와 고양이 두 마리가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시각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음으로 거실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새벽이 오기 전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누이가 떠나고 그 부재의 현전을 실감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각이었다. 산 자는 어떻게든 살지만 죽은 자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누이의 장례식장에서 먹은 육개장 국물의 맛을 떠올리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서럽고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마는 육친을 떠나보내는 것은 더 큰 상실감을 갖게 한다. 부모님 중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안성에 와 있던 어머니가 그 뒤를 이어 떠났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 가슴이 메말라 슬픔 한 조각도 없었던가? 통곡하 듯 울음을 토해낸 것은 장례 끝나고 보름쯤 지났을 때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다했구나, 하는 자각이 스친 찰나 내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한밤중 시골집 부엌에서 혼자 앉아서 통곡을 쏟아냈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겪지는 않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란 생리적인 운동과 활동을 멈추고 무존재로 돌아가는 일이다. 살아서는 겪을 수 없는 일, 누구나 단 한 번만 겪을 수 있는 실존적 사건, 살아 있음에 반대되는 것, 그 확실성이 죽음이다. 삶은 몸을 갖고 온갖 슬픔과 근심을 끌어안고 느끼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게 삶이다.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도덕경경 13장)

오후 산책을 마친 뒤 붉은 줄장미 피어 있는 집을 지나쳐 돌아온다. 목덜미에 닿은 햇볕이 따갑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잠겨 있던 롤랑 바르트는 나날의 소회를 일기에 적었다. 그 일기를 묶은 책이 ‘애도일기’다. 스쳐 읽은 것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왔던 것은 가고 간 것은 돌아온다.

누이가 떠나고 내 안에도 순수한 슬픔이 고인 고랑이 생겼다. 누이여, 그대 있는 곳에도 6월의 붉은 장미가 활짝 피고, 장미꽃 향기를 품은 바람도 부는가? 그대 돌아간 곳에서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고 평안을 누리시게. 필경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는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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