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민이 잘 살아야 선진국…농어업 디지털 전환 박차”
[광주일보가 만난 경제인] 홍문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
면세유 연장·농기계 임대법 주도 ‘농어촌 대통령’ 불린 4선 의원 출신
농수축산물 유통구조 1~2단계로 줄여 그 혜택 생산자에 돌려드릴 것
면세유 연장·농기계 임대법 주도 ‘농어촌 대통령’ 불린 4선 의원 출신
농수축산물 유통구조 1~2단계로 줄여 그 혜택 생산자에 돌려드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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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80년 만에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문화강국으로 거듭났다. 2023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GNI)에서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하는 등 세계 어느 국가도 해보지 못한 업적을 이뤘다. 뛰어난 민족성, 근면·성실함, 우수한 두뇌, 불편을 참지 못하는 습성, 세계 경제 흐름과의 조화 등의 요소가 다행히 일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나 전쟁을 겪고 국가 재건에 청춘과 일생을 바쳤던 70~80대들의 땀방울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과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 성공한 해방 1세대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던 시기, 밑바닥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각고의 노력과 창의적 사고로 몇 단계를 뛰어넘어 최고의 위치에 올랐으며, 뛰어난 실적으로 주변의 인정을 받아 그 자리를 지켰다.
2024년 8월 나주 빛가람혁신도시에 자리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으로 변신한 홍문표(77)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이목구비, 세련된 매너와 나이를 잊게 하는 산뜻한 옷차림이 우선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랜 시간 태권도, 유도, 검도 등으로 다져진 몸에 스트레칭과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는 그는 서울, 세종, 빛가람혁신도시를 오가며 바쁘게 살고 있다.
홍 사장은 무엇보다 농어민과 소비자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기 위해 농수산물 유통구조 혁신에 온 열정을 쏟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공사 1층 입구, 사장실, 사무실은 물론 명함에도 자신의 소신인 “농어촌과 농어민(축산)이 잘 사는 대한민국이 강한 선진국이 된다”고 적어두었다. 그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4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공사 사장을 맡아 자신의 마지막 소임인 ‘잘 사는 농어촌’을 위해 지금까지 쌓아온 지혜, 능력, 인적 네트워크 등 모든 것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 임기 16년 가운데 14년을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으로 지낸 홍 사장은 농수산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면세유 5년 연장법, 농기계 임대법 등의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농지 연금제도 최초 도입 등 농어업 발전 기반 마련과 제도 개선에 앞장서 농어민들에게 ‘농어촌 대통령’이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 특히 지난 2007년 농어민 면세유 혜택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농업용 면세유 연장법을 대표 발의해 계속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어느 별명보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그에게 성장 과정, 정치인으로서의 고뇌, 공사 경영 방침, 농수산물 유통 혁신 과제 등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4년 8월 20일 취임사에서 농어촌이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화제였다.
▲대부분 알고 있듯 농어촌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고령화에 경영비 급등, 인력난, 세계적인 이상기후 현상, 보호무역주의 심화 등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며,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농어촌은 소멸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하기 쉬운 문제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농어업을 지속가능하면서 더 성장시키는 방법은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을 활용해 농어업의 디지털 전환을 앞당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신사업을 육성해 미래성장 산업으로 농어업을 개편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농어촌, 농어민만 생각하며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각해온 것으로, 이를 현장에서 실현시킬 기회가 생겨 기쁜 마음이다.
=17·19·20·21대 국회의원을 지낸 4선 의원 출신이다.
▲1967년 신민당 대표위원 유진오 박사 선거운동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1985년 6월 이재형 국회의장의 정무수석 비서관을 지냈다.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두며 57년간 우리나라 정치를 경험했다. 국회의원 출마는 지난 1988년 제13대 선거부터 시작했으나 뜻을 이룬 것은 16년만인 제17대 선거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한 번 낙선해 모두 16년간 국회에 있었고 그 중 14년을 농해수위에만 있었다. 자연스럽게 농어촌 전문가, 농어민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의 아들이었고,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동곡마을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주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향에 대한 진심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국회에서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교육위원회 위원장, 한국-러시아 의회외교포럼 회장 등을 거쳤고, 2008~2011년 3년간 한국농어촌공사 사장도 지냈다. 이 모든 경험과 노하우, 정치 경력, 인적 네트워크 등을 농수산물 유통에 쏟아 부을 각오다.
=언뜻 보면 고생 한 번 안 해 본 얼굴이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우리나라 시골마을이 어떤 모습이었을 지를 상상해보라.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면 서기나 학교 교사가 최고의 직업으로 여겨졌던 시대다.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을 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 내려 사람이 건너는 횡단보도 신호등을 처음 봤다. 불빛에 맞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패싸움을 하는 줄 알 정도로 무지했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선 바 있는 조병옥 박사를 모셨던 김사진이라는 분을 집안끼리 알고 지냈는데, 돈암동에서 살고 있는 그를 무작정 찾아갔다. 거처할 곳을 얻은 뒤 처음에는 미아리 미도극장에서 구두닦이들에게 구두를 가져다주는 일을 하다가 신문 배달을 거쳐 물지게를 날랐다. 덩치가 있어 힘이 좀 있게 보인다며 소개를 받은 것이다. 양쪽에 물지게를 지고, 수도가 없었던 고지대 판잣집, 양계장 등에 물을 공급해주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문득 중학교 때 공부하던 시절 꿈이 생각났다. 당시 우리나라의 법질서가 형성되기 전이었고, 주먹이나 권력이 먼저였는데, 이를 바로 잡으려면 법관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서울 돈암동에 청산학원이라는 검정고시 학원에 들어가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그는 60년 이상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서 이름, 명칭 등을 마치 어제 일처럼 술술 이야기했다.)
=건국대학교 농대에 입학했는데.
▲1964년 17살의 나이에 한영고 야간반에 입학했다. 학원에서 지금의 매니저, 총무 역할을 맡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어 1967년 건국대 농대 농화학과에 입학했다. 장학금이 가장 큰 매력이었고, 건국대 농대가 커트라인도 상당히 높아 인기도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을지로 4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 다니며 유도와 태권도를 배웠다. 법보다 폭력이 앞선 세상이었으며, 호신술이라도 배워놔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중에는 태권도 실력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용산구 용산기지에서 미8군 장병들 사범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 써클에서 가입을 요청했다. 다 거절했지만 항상 주위에 사람들이 모였고, 리더를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 와중에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신민당의 유진오 후보를 도왔다. 그것이 첫 정치 경험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듣고 싶다.
▲정치 쪽에 뜻을 두고 계속 활동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할아버님과 당시 이재형 국회의장의 인연을 알게 됐다. 이재형 국회의장이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홍성으로 와 할아버지 댁에 머무르면서 신세를 진 것이다. 그 이후 수확기가 끝나면 쌀을 보내주는 등 인연을 이어온 할아버님의 소개로 이재형 국회의장의 의전 비서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1985년 6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일했다. 당시 정치는 살벌했다. 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국회의원실에 다 앉아 있을 정도였다. 국회의장 정무수석은 청와대 회의에도 참석이 가능했는데, 정치적 안목을 키우고 현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하지만 의장께서 민정당 가입을 요청했는데 거절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저는 학생 대표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졸업 이후에도 건국대, 고려대, 경희대 등 학생 대표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정부 정서가 강해 1년여 간의 마찰 끝내 입당을 안 했고 결국 그만뒀다. 이 의장께서 현장에서 정치를 하라고 권유해 그 다음부터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생각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면서 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동교동계가 되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조병옥 박사 또는 신익희 선생이 쓰신 ‘행동하는 철학’이라는 글귀를 무척 좋아했다. 대학생으로, 당시 대통령 후보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소위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던 분들을 직접 경험했다. 지금도 권노갑 전 의원과 굉장히 친한데, 그 때 김대중 선생을 모셨기 때문이다. 충청도에서는 당시 김대중 선생이 별 인기가 없었는데, 저는 좋아했다. 정의롭고, 똑똑하셨고, 정이 있으셨다. 만날 때마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곤 하셨는데, 그 정겨움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 뒤로 역경이 있었다.
▲오랫동안 배지를 못 달았다. 무소속으로 1988년 고향 청양·홍성에서 첫 출마에 나섰다. 돈과 힘이 없으면 대적하기 어려운 것이 정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했다. 이후 정치를 해서 힘을 기르고 존경 받는 정치인이 되고자 민주당,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등으로 각각 나섰는데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했다. 4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2004년 정치 입문 37년 만에, 나이 57세에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충청권에서 한나라당이 거의 궤멸됐는데, 유일하게 당선되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고향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57년 경력의, 실패와 성공의 역사를 모두 간직한 정치인이 지금 정치를 평가한다면.
▲지금 정치는 무질서하다. 선후배도 없고, 정책도 없으며, 단지 숫자에 의해 정치가 이뤄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가장 훌륭한 정치는 예측 가능한 정치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원칙이 무너진 정치가 오늘의 (12·3 계엄과 탄핵) 현실을 낳은 것이라고 본다. 지금이라도 (후배들이)신뢰 받는 정치를 시작했으면 한다. 정치에 뜻이 있는 예비 정치인이나 초선 의원의 경우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돈이나 학벌, 인맥, 출신 등으로 정치에 입문하면서 정당 생활도 안 해보고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정치에 입문하기 때문이다. 지역민과 국민 모두를 위해 조직과 정책을 배우는 과정을 좀 밟아야 한다.
=자, 이제 일 이야기도 해보자. 소신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를 드리겠다.
▲소신은 좀 전에도 말했지만, 농어촌 어민들이 잘 살아야 강한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다. 농어민들이 홀대 받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지만, 그들이 없다면 5,200만 우리 국민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아주 소중한 분들이며, 그에 맞는 처우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로 가야지, 강대국으로 가서는 안 된다. 국민이 잘 살고, 특히 농어민들이 잘 사는 국가, 예를 들어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등과 같은 국가가 모델이 되어야 한다.
=사장 취임 이후 농수축산물의 유통구조 혁신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농수축산물의 유통 구조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보통 4~5단계 정도인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거의 생산자가 부담하고 있다. 공사가 할 일은 이를 1~2단계로 줄여 생산자에게 이익을 주고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국회의원 시절 IT 강국인 우리나라의 여건을 생각해 온라인 도매제도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시공간 제약 없이 전국 단위의 비대면 거래가 가능한 세계최초 ‘농수산물 온라인도매시장’을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획기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목표였던 5,000억 원 대비 35% 초과 달성한 6,737억 원의 거래 실적을 달성했으며, 2025년 1조 원, 2027년까지 가락시장 규모인 5조 원 시장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 거래가 절실했던 제주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제주조공)은 지난해 농수산물 온라인도매시장을 통해 92억 원 상당의 감귤과 채소(양배추, 당근)를 판매하며, 산지 직거래를 통해 유통비용 10.1%p 감소시켜 농가들이 4.5%의 이익을 더 가져가는 효과를 거뒀다. 농수산물을 구매하는 대형마트·백화점 등의 대형 소매업체에서는 온라인도매시장을 통해 지난해 약 150억 원, 2,000여t의 딸기, 감귤, 사과 등 청과류를 구매했으며, 유통비용 11.9%p가 감소하고, 농가가 가져가는 이익은 4.9% 상승했다.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과거 직원들이 일일이 산지를 찾아가 판매처를 발굴해야 했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 전국의 다양한 상품을 실시간 검색하고 비교하여 신속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농수축산물 유통구조를 혁신하기 위해 4년 전부터 노력해왔는데 와서 실제로 이뤄지는 것을 보고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 이와 함께 직거래 장터를 곳곳에 조성해 필요한 사람이 언제 어느 곳에서든 농수산물을 사갈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지난해 시범사업으로 추진한 ‘지자체-삼성웰스토리’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024년 12월 홍성군에서 구매상담회 및 수출컨설팅이 개최됐는데, 내수기업의 수출기업화, 대기업 요구사항에 맞춤 제품 개발 관련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생산지 현장 실사, 위생 및 품질 관련 거래 준비가 현재 진행 중이다. 올해는 ‘aT·지자체 협업장터 및 구매상담회’로 기존의 장터 운영방식에서 혁신을 더해 농어민의 소득증진 방안을 마련하고자 세부사항을 준비하고 있다. 과천·서울·경북·충남·전남 등 광역시도 대표 장터 5개소에서 품평회 및 구매상담회 5차례, 시·군 단위 정례 장터 10개소에서 구매상담회 10차례를 진행할 생각이다.
=취임 이후 성과를 요약해달라.
▲우선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수급 TF를 구성하고, 기후변화 대응 7대 혁신 방향을 제시했다. 공사의 핵심 사업 분야인 ‘수급·유통·수출’과 관련 분야별 공청회를 개최해 전문가, 이해관계인 등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면서 한편으로는 삼성, 인천항만공사 등과 속도감 있게 MOU를 체결했다. 지역농산물 구매상담회를 통한 직거래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온라인도매시장을 활성화시켜 거래액 5,000억 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K-푸드 수출 확대를 위해 유럽을 현장 점검하고 푸랑크푸르트지사 개소를 진두지휘했다. 열심히 하다보니 농림축산식품부, 행정안전부 등 정부부처, 한국정책학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으로부터 무려 18가지 상을 받았다.
=기후변화 대응 7대 혁신 방향이 궁금하다.
▲친환경·저탄소 농어업 전환, 씨종자·신품종 개량, 저온비축기지(거점별 광역화), 유통구조 개선(온라인도매시장·직거래장터), 식량무기화 시대 쌀 주식개념 5곡으로 전환, 통계농업 및 사계절 스마트팜, 농수축산식품 수출로 대한민국(식품) 영토 확장 등이다. 5,200만 국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aT 사장으로 부임한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정부와 함께 이를 중점 추진해 나갈 생각이다.
=정치인 시절 갖게 된 습관이 있다면.
▲매일 자정 뉴스를 보고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다. 새벽 1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난다. 잠이 좀 부족하지만 중간 중간 이동하면서 보충하기도 하고 오랜 습관이 돼 버틸 만하다. 아침에는 일기 방식으로 할 일들을 정리하고, 일주일에 세 번씩 스트레칭을 하며 건강을 돌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으로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 모습을 지키며, 품격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계보 없이 누군가를 따라다니며 산 적이 없다. 패거리에 들지 않고 독불장군으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이 농어촌, 농어민, 축산인이 잘 살아야 강한 선진국이 된다”는 좌우명을 지키며 법·제도를 만들고 고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제는 제가 주도한 법·제도를 잘 활용해 실천하는 자리에 와 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우리 농수산물을 식품으로 가공해 수출하며, K-푸드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다. 공사의 해외지사가 20곳이 있는데, 이곳을 거점으로 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반도체로 먹고 살았다면, 이제는 K-푸드를 잘 살려 투톱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제가 와서 기후변화 대응 TF팀을 구성했는데, 관련 아젠다를 만드는 한편 씨종자를 보유하고 신품종을 다양하게 생산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농업도 과거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통계를 기반으로 하면서, 쌀만이 아니라 콩, 보리, 밀, 옥수수를 포함한 오곡에 대한 생산 및 유통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들이 주곡은 무기라는 경각심을 갖고 농촌과 농민을 다시 바라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국민과 지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주에서 일주일의 절반을 보내고 있다. 나주시와 다양한 정책 연대를 하기 위해 자주 만날 생각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시장경제 기능이 잘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시장경제에서는 노력하는 사람이 그만큼 대가를 받는 것이다. 나주를 비롯하여 광주·전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찾아내겠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2024년 8월 나주 빛가람혁신도시에 자리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으로 변신한 홍문표(77)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이목구비, 세련된 매너와 나이를 잊게 하는 산뜻한 옷차림이 우선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랜 시간 태권도, 유도, 검도 등으로 다져진 몸에 스트레칭과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는 그는 서울, 세종, 빛가람혁신도시를 오가며 바쁘게 살고 있다.
국회의원 임기 16년 가운데 14년을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으로 지낸 홍 사장은 농수산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면세유 5년 연장법, 농기계 임대법 등의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농지 연금제도 최초 도입 등 농어업 발전 기반 마련과 제도 개선에 앞장서 농어민들에게 ‘농어촌 대통령’이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 특히 지난 2007년 농어민 면세유 혜택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농업용 면세유 연장법을 대표 발의해 계속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어느 별명보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그에게 성장 과정, 정치인으로서의 고뇌, 공사 경영 방침, 농수산물 유통 혁신 과제 등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4년 8월 20일 취임사에서 농어촌이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화제였다.
▲대부분 알고 있듯 농어촌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고령화에 경영비 급등, 인력난, 세계적인 이상기후 현상, 보호무역주의 심화 등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며,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농어촌은 소멸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하기 쉬운 문제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농어업을 지속가능하면서 더 성장시키는 방법은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을 활용해 농어업의 디지털 전환을 앞당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신사업을 육성해 미래성장 산업으로 농어업을 개편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농어촌, 농어민만 생각하며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각해온 것으로, 이를 현장에서 실현시킬 기회가 생겨 기쁜 마음이다.
=17·19·20·21대 국회의원을 지낸 4선 의원 출신이다.
▲1967년 신민당 대표위원 유진오 박사 선거운동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1985년 6월 이재형 국회의장의 정무수석 비서관을 지냈다.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두며 57년간 우리나라 정치를 경험했다. 국회의원 출마는 지난 1988년 제13대 선거부터 시작했으나 뜻을 이룬 것은 16년만인 제17대 선거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한 번 낙선해 모두 16년간 국회에 있었고 그 중 14년을 농해수위에만 있었다. 자연스럽게 농어촌 전문가, 농어민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의 아들이었고,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동곡마을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주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향에 대한 진심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국회에서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교육위원회 위원장, 한국-러시아 의회외교포럼 회장 등을 거쳤고, 2008~2011년 3년간 한국농어촌공사 사장도 지냈다. 이 모든 경험과 노하우, 정치 경력, 인적 네트워크 등을 농수산물 유통에 쏟아 부을 각오다.
=언뜻 보면 고생 한 번 안 해 본 얼굴이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우리나라 시골마을이 어떤 모습이었을 지를 상상해보라.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면 서기나 학교 교사가 최고의 직업으로 여겨졌던 시대다.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을 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 내려 사람이 건너는 횡단보도 신호등을 처음 봤다. 불빛에 맞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패싸움을 하는 줄 알 정도로 무지했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선 바 있는 조병옥 박사를 모셨던 김사진이라는 분을 집안끼리 알고 지냈는데, 돈암동에서 살고 있는 그를 무작정 찾아갔다. 거처할 곳을 얻은 뒤 처음에는 미아리 미도극장에서 구두닦이들에게 구두를 가져다주는 일을 하다가 신문 배달을 거쳐 물지게를 날랐다. 덩치가 있어 힘이 좀 있게 보인다며 소개를 받은 것이다. 양쪽에 물지게를 지고, 수도가 없었던 고지대 판잣집, 양계장 등에 물을 공급해주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문득 중학교 때 공부하던 시절 꿈이 생각났다. 당시 우리나라의 법질서가 형성되기 전이었고, 주먹이나 권력이 먼저였는데, 이를 바로 잡으려면 법관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서울 돈암동에 청산학원이라는 검정고시 학원에 들어가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그는 60년 이상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서 이름, 명칭 등을 마치 어제 일처럼 술술 이야기했다.)
=건국대학교 농대에 입학했는데.
▲1964년 17살의 나이에 한영고 야간반에 입학했다. 학원에서 지금의 매니저, 총무 역할을 맡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어 1967년 건국대 농대 농화학과에 입학했다. 장학금이 가장 큰 매력이었고, 건국대 농대가 커트라인도 상당히 높아 인기도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을지로 4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 다니며 유도와 태권도를 배웠다. 법보다 폭력이 앞선 세상이었으며, 호신술이라도 배워놔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중에는 태권도 실력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용산구 용산기지에서 미8군 장병들 사범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 써클에서 가입을 요청했다. 다 거절했지만 항상 주위에 사람들이 모였고, 리더를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 와중에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신민당의 유진오 후보를 도왔다. 그것이 첫 정치 경험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듣고 싶다.
▲정치 쪽에 뜻을 두고 계속 활동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할아버님과 당시 이재형 국회의장의 인연을 알게 됐다. 이재형 국회의장이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홍성으로 와 할아버지 댁에 머무르면서 신세를 진 것이다. 그 이후 수확기가 끝나면 쌀을 보내주는 등 인연을 이어온 할아버님의 소개로 이재형 국회의장의 의전 비서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1985년 6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일했다. 당시 정치는 살벌했다. 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국회의원실에 다 앉아 있을 정도였다. 국회의장 정무수석은 청와대 회의에도 참석이 가능했는데, 정치적 안목을 키우고 현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하지만 의장께서 민정당 가입을 요청했는데 거절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저는 학생 대표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졸업 이후에도 건국대, 고려대, 경희대 등 학생 대표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정부 정서가 강해 1년여 간의 마찰 끝내 입당을 안 했고 결국 그만뒀다. 이 의장께서 현장에서 정치를 하라고 권유해 그 다음부터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생각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면서 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동교동계가 되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조병옥 박사 또는 신익희 선생이 쓰신 ‘행동하는 철학’이라는 글귀를 무척 좋아했다. 대학생으로, 당시 대통령 후보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소위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던 분들을 직접 경험했다. 지금도 권노갑 전 의원과 굉장히 친한데, 그 때 김대중 선생을 모셨기 때문이다. 충청도에서는 당시 김대중 선생이 별 인기가 없었는데, 저는 좋아했다. 정의롭고, 똑똑하셨고, 정이 있으셨다. 만날 때마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곤 하셨는데, 그 정겨움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 뒤로 역경이 있었다.
▲오랫동안 배지를 못 달았다. 무소속으로 1988년 고향 청양·홍성에서 첫 출마에 나섰다. 돈과 힘이 없으면 대적하기 어려운 것이 정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했다. 이후 정치를 해서 힘을 기르고 존경 받는 정치인이 되고자 민주당,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등으로 각각 나섰는데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했다. 4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2004년 정치 입문 37년 만에, 나이 57세에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충청권에서 한나라당이 거의 궤멸됐는데, 유일하게 당선되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고향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57년 경력의, 실패와 성공의 역사를 모두 간직한 정치인이 지금 정치를 평가한다면.
▲지금 정치는 무질서하다. 선후배도 없고, 정책도 없으며, 단지 숫자에 의해 정치가 이뤄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가장 훌륭한 정치는 예측 가능한 정치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원칙이 무너진 정치가 오늘의 (12·3 계엄과 탄핵) 현실을 낳은 것이라고 본다. 지금이라도 (후배들이)신뢰 받는 정치를 시작했으면 한다. 정치에 뜻이 있는 예비 정치인이나 초선 의원의 경우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돈이나 학벌, 인맥, 출신 등으로 정치에 입문하면서 정당 생활도 안 해보고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정치에 입문하기 때문이다. 지역민과 국민 모두를 위해 조직과 정책을 배우는 과정을 좀 밟아야 한다.
=자, 이제 일 이야기도 해보자. 소신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를 드리겠다.
▲소신은 좀 전에도 말했지만, 농어촌 어민들이 잘 살아야 강한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다. 농어민들이 홀대 받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지만, 그들이 없다면 5,200만 우리 국민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아주 소중한 분들이며, 그에 맞는 처우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로 가야지, 강대국으로 가서는 안 된다. 국민이 잘 살고, 특히 농어민들이 잘 사는 국가, 예를 들어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등과 같은 국가가 모델이 되어야 한다.
=사장 취임 이후 농수축산물의 유통구조 혁신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농수축산물의 유통 구조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보통 4~5단계 정도인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거의 생산자가 부담하고 있다. 공사가 할 일은 이를 1~2단계로 줄여 생산자에게 이익을 주고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국회의원 시절 IT 강국인 우리나라의 여건을 생각해 온라인 도매제도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시공간 제약 없이 전국 단위의 비대면 거래가 가능한 세계최초 ‘농수산물 온라인도매시장’을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획기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목표였던 5,000억 원 대비 35% 초과 달성한 6,737억 원의 거래 실적을 달성했으며, 2025년 1조 원, 2027년까지 가락시장 규모인 5조 원 시장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 거래가 절실했던 제주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제주조공)은 지난해 농수산물 온라인도매시장을 통해 92억 원 상당의 감귤과 채소(양배추, 당근)를 판매하며, 산지 직거래를 통해 유통비용 10.1%p 감소시켜 농가들이 4.5%의 이익을 더 가져가는 효과를 거뒀다. 농수산물을 구매하는 대형마트·백화점 등의 대형 소매업체에서는 온라인도매시장을 통해 지난해 약 150억 원, 2,000여t의 딸기, 감귤, 사과 등 청과류를 구매했으며, 유통비용 11.9%p가 감소하고, 농가가 가져가는 이익은 4.9% 상승했다.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과거 직원들이 일일이 산지를 찾아가 판매처를 발굴해야 했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 전국의 다양한 상품을 실시간 검색하고 비교하여 신속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농수축산물 유통구조를 혁신하기 위해 4년 전부터 노력해왔는데 와서 실제로 이뤄지는 것을 보고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 이와 함께 직거래 장터를 곳곳에 조성해 필요한 사람이 언제 어느 곳에서든 농수산물을 사갈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지난해 시범사업으로 추진한 ‘지자체-삼성웰스토리’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024년 12월 홍성군에서 구매상담회 및 수출컨설팅이 개최됐는데, 내수기업의 수출기업화, 대기업 요구사항에 맞춤 제품 개발 관련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생산지 현장 실사, 위생 및 품질 관련 거래 준비가 현재 진행 중이다. 올해는 ‘aT·지자체 협업장터 및 구매상담회’로 기존의 장터 운영방식에서 혁신을 더해 농어민의 소득증진 방안을 마련하고자 세부사항을 준비하고 있다. 과천·서울·경북·충남·전남 등 광역시도 대표 장터 5개소에서 품평회 및 구매상담회 5차례, 시·군 단위 정례 장터 10개소에서 구매상담회 10차례를 진행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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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수급 TF를 구성하고, 기후변화 대응 7대 혁신 방향을 제시했다. 공사의 핵심 사업 분야인 ‘수급·유통·수출’과 관련 분야별 공청회를 개최해 전문가, 이해관계인 등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면서 한편으로는 삼성, 인천항만공사 등과 속도감 있게 MOU를 체결했다. 지역농산물 구매상담회를 통한 직거래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온라인도매시장을 활성화시켜 거래액 5,000억 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K-푸드 수출 확대를 위해 유럽을 현장 점검하고 푸랑크푸르트지사 개소를 진두지휘했다. 열심히 하다보니 농림축산식품부, 행정안전부 등 정부부처, 한국정책학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으로부터 무려 18가지 상을 받았다.
=기후변화 대응 7대 혁신 방향이 궁금하다.
▲친환경·저탄소 농어업 전환, 씨종자·신품종 개량, 저온비축기지(거점별 광역화), 유통구조 개선(온라인도매시장·직거래장터), 식량무기화 시대 쌀 주식개념 5곡으로 전환, 통계농업 및 사계절 스마트팜, 농수축산식품 수출로 대한민국(식품) 영토 확장 등이다. 5,200만 국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aT 사장으로 부임한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정부와 함께 이를 중점 추진해 나갈 생각이다.
=정치인 시절 갖게 된 습관이 있다면.
▲매일 자정 뉴스를 보고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다. 새벽 1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난다. 잠이 좀 부족하지만 중간 중간 이동하면서 보충하기도 하고 오랜 습관이 돼 버틸 만하다. 아침에는 일기 방식으로 할 일들을 정리하고, 일주일에 세 번씩 스트레칭을 하며 건강을 돌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으로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 모습을 지키며, 품격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계보 없이 누군가를 따라다니며 산 적이 없다. 패거리에 들지 않고 독불장군으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이 농어촌, 농어민, 축산인이 잘 살아야 강한 선진국이 된다”는 좌우명을 지키며 법·제도를 만들고 고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제는 제가 주도한 법·제도를 잘 활용해 실천하는 자리에 와 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우리 농수산물을 식품으로 가공해 수출하며, K-푸드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다. 공사의 해외지사가 20곳이 있는데, 이곳을 거점으로 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반도체로 먹고 살았다면, 이제는 K-푸드를 잘 살려 투톱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제가 와서 기후변화 대응 TF팀을 구성했는데, 관련 아젠다를 만드는 한편 씨종자를 보유하고 신품종을 다양하게 생산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농업도 과거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통계를 기반으로 하면서, 쌀만이 아니라 콩, 보리, 밀, 옥수수를 포함한 오곡에 대한 생산 및 유통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들이 주곡은 무기라는 경각심을 갖고 농촌과 농민을 다시 바라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국민과 지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주에서 일주일의 절반을 보내고 있다. 나주시와 다양한 정책 연대를 하기 위해 자주 만날 생각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시장경제 기능이 잘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시장경제에서는 노력하는 사람이 그만큼 대가를 받는 것이다. 나주를 비롯하여 광주·전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찾아내겠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