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회사를 키운 90%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
[광주일보가 만난 경제인] 박흥석 하남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
팔순 앞둔 지금도 20여 봉사단체장·후원회장 맡아 지역에 헌신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수습·광양제철소 전력 해결 기억에 남아
팔순 앞둔 지금도 20여 봉사단체장·후원회장 맡아 지역에 헌신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수습·광양제철소 전력 해결 기억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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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30일 흥국상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박흥석 (주)럭키산업 대표이사는 지난 50여 년간 다양한 봉사단체의 수장을 맡으며 지역에 헌신해왔다.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있을 수 없는 ‘전무후무’하다고 밖에 평가할 수 없다.
1974년 주변의 권유로 광주새마을협의회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1년부터 16년간 북구 바르게살기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회 최우수회장상을 전국 최초로 연속 3회 수상하는 업적을 남겼다. 1995년 대한적십자사 상임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2025년 현재까지 20여 개의 봉사단체장이나 후원회 회장직을 맡아 조직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경선이나 경쟁 없이 오로지 권고와 추대로 직책을 맡으면서 조직 간 화합과 단결력을 높여 성과를 냈다. 문화·체육·장학·봉사·경제 등과 관련한 공적 업무를 주로 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사업을 챙길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상훈도 뒤따랐다. 1987년 10월 저축의날 동탑산업훈장을 시작으로 대통령 표창, 장관상, 광주시민대상, 우수중소기업인상, 대한적십자사 광무장 금장 등 20여 건에 이른다.
기업인이면서, 지역 내 경제·봉사 관련 기관·단체를 진두지휘하고, 광주·전남의 국제대회·이벤트·축제 등의 유치·추진에 있어 언제나 가장 앞장 서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점은 명백한 그의 공적이다. 하남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실에서 만난 그의 첫 느낌은 신선했다. 평범한 바지와 셔츠에 재킷을 걸친 그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이면지에 적어왔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매년 수억 원의 개인 재산을 기부해온 그는 자신에게는 아끼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팔순을 앞둔 그에게 52년간 경제인으로 살아온 그의 속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군 제대 후 바로 공직을 선택했다. 상사들의 따뜻한 배려와 직장 분위기 덕분에 정년까지 이어갈 계획이었지만, 결혼 후 자녀들이 생기면서 교육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젊었을 때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도전해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시작하기 전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 번째는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정직은 저의 철학이자 삶의 기본 원칙으로, 순간적인 이익보다는 신뢰가 장기적으로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만든다고 확신했다. 두 번째는 자산 범위 내에서만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은행 대출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자금을 빌리는 일도 지양하며, 철저히 제 자산에 맞춰 사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세 번째는 실패하더라도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하자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출발을 위한 전략으로, 위험을 줄이는 동시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사업이 성장하게 된 배경이 있다면.
▲자금과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활용품 도·소매업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1972년 12월 30일 ‘흥국상사’라는 이름으로 소박하게 사업을 시작했다. 앞서의 원칙을 지키며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상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준비했다. 사업 초기 걱정이 있었지만, 고객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매장을 직접 찾아주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서도 주문하는 고객들이 점점 늘어났다. 특히 회사에 재고가 없는 상품을 주문받은 경우 제가 직접 대리점 가격으로 구매하여 이익 없이 제공했더니, 고객들이 크게 만족했다. 순간적인 이익보다 고객과의 신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이를 지킨 노력이 소비자와의 신뢰를 더욱 견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밤낮없이 최선을 다했다.
=사업이 초기부터 자리잡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1973년 10월이었다. 벌써 52년 전의 일인데, 라디오 뉴스에서 석유파동으로 중동 산유국의 생산량 감소가 우리나라 같은 비산유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보도를 접했다. 마침 제가 취급하는 생활용품 중 석유제품과 연관이 있는 상품들이 상당했는데, 우선 재고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적해 두었던 자금과 비상금을 활용하여 껌, 파리모기약, 세탁세제 등 석유 관련 상품들을 판매하는 대리점, 출장소, 대형 약국, 공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가능한 전량 매입해 몇 곳에 나누어 보관했다. 두 달여가 지나자 이들 상품들의 가격이 급등하고 품절 현상까지 일어났다. 당시 대리점과 도매상들에게는 절반의 이익만 보고, 고객들에게는 기존 가격으로 제공하면서 고객들과의 신뢰를 한층 더 두텁게 쌓았다. 이것이 주변에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회사로 각인 시켜주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마치 몇십년의 긴 세월을 보낸 것처럼, 변화와 도전 그리고 새로운 경험들로 가득한 시기였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더 지혜롭고 단단하게 다듬어졌다.
=그 뒤에 대기업들의 광주·전남 총판을 시작했다.
▲그렇다. 도·소매업을 정리하고 제일제당·롯데 대리점, 서울유지 광주전남 총판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하였다. 사업영역도 광주에서 전남까지 확장하였고, 사무실과 창고, 자택을 겸한 건축물도 매입하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투자를 해 차량 4대를 추가 구입했으며, 경험이 풍부한 경력직을 채용한 뒤 3개월간 본사에서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첫 달부터 목표량을 초과 달성했으며, 본사와 거래처 간의 중간 역할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회사를 믿고 따랐으며, 그들이 오랜 시간 저와 함께 하며 안정적으로 사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삼양식품 상품 가운데 라면과 뽀빠이 과자의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이 상품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것이 당시 영업의 핵심이었다. 광주에 모두 3곳의 삼양식품 대리점이 있었고, 그 중 한 곳의 점주가 개인 사정으로 대리점을 내놓으면서 본사가 공모를 실시했었다. 저를 포함해 모두 6곳이 참여하였는데, 5곳이 전국적으로 명망 있는 유통업체였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심사 결과 5개 항목 가운데 3개에서 경합 업체들을 압도하면서 최종 선정되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사업가, 시장 상인 대상 여론조사에서의 1위, 무차입 경영 방식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모든 상품이 고르게 매출이 오르면서 그해 전국 최우수 대리점으로 선정되었고, 부상으로 받은 400만 원과 공장 도매가보다 10% 할인된 가격으로 받은 라면 2,000박스를 다른 대리점들과 나누면서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전국 대리점 가운데 4명을 선발하여 본사 대표와 사업부장 등과 함께 회사 정책을 수립·최종 결정하는 전국 특별상담역에 선정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었고, 회사 역시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10월 지금의 럭키산업, 즉 제조업으로 업종을 변경했는데.
▲지금의 LG그룹이 나주의 호남비료 공장을 인수하면서, 해당 부지에 LG화학과 칫솔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주에서 생산하던 칫솔 품목도 함께 이전하며 외주업체를 선정하는데, 당시 LG그룹 회장께서 저를 추천했다. 그런데 이미 한국타이어, 천광유지비누, 기아자동차 납품업체들과의 계약해 월 임대료 1,500만 원에 달하는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고사했었다. 하지만 6개월 후 LG그룹 회장께서 재차 권유하셨다. 이에 “지금까지 주말도 없이 가족, 특히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도 거의 없었고, 특히 제조업은 경험이 없어 자신이 없다”고 솔직히 답했더니 그 회장께서는 “나도 집에서 가족들과 머무는 시간이 한 달 평균 7~8일에 불과하며, 국내외 출장으로 개인 시간도 거의 없지만 기업 경영은 그 자체로 사회에 큰 기여”라고 강조하셨다. 이어 “광주에서 200명 정도를 고용한다면 1년에 불우이웃돕기에 수천만 원을 기부하는 것보다 몇 배 더 훌륭한 애국자”라고 덧붙이셨다. 그러면서 “제조업을 하려면 직접 현장을 관리하고 문제를 해결·대처하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한데 적임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다시 해보라고 하셨다. 제가 얼마나 단순하고 경솔했는지를 깨닫고, 가까운 이익만을 좇았던 과오를 깊이 반성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려가서 시작하겠습니다”고 결심을 전했다. 이후 하남산업단지의 현 위치에 부지를 매입하고, 사업 상호를 ‘호남산업’으로 정해 제조업을 시작했다. 공장이 완공된 후 상호를 ‘럭키산업’으로 변경하였고, 그 이름으로 현재까지 40년 동안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2011년에는 베트남에 해외 지사인 ‘럭키비나’를 설립하며 글로벌 시장으로도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며 지금까지 사업을 이어올 수 있어 자부심을 느낀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웠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생활용품 유통판매업을 정리하려던 중 LG 본사 직원이 찾아와 생활용품 대리점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이후 본사 소장과 광주전남본부장까지 찾아와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이들은 조직 활용과 특별 지원을 약속하며 기회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결국 손해 볼 일이 없겠다는 판단으로 대리점을 맡기로 결정했다. 1976년 LG생활건강사업부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했지만, 초도 상품을 공급한 직후부터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거래처들로부터 “시중 가격보다 비싸다”는 항의가 쏟아졌고, 조사 결과 본사에서 4% 할인된 가격으로 공급했음에도 시중에서는 더 저렴한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손해를 감수하며 판매해야 했고, 거래처들은 제 개인과의 신뢰로 물건을 받아갔지만, 점점 부담이 커져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계약 후 3개월 만에 거래 정지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본사 사업부장이 직접 내려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지역의 총판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다. 저는 가격 문제 해결을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우며, 차별화된 제품 지원과 현 상황의 근본적인 해결을 약속받는다면 사업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종적으로 전남·북의 특판 총판만 맡기로 협의하며 새로운 조건으로 사업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간 막대한 손실을 보았지만 본사에서 약속한 지원을 성실히 이행해 주었고, 다양한 협력 방안을 제시하며 힘을 보태준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극복의 과정은 LG그룹과의 협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결과적으로 호남 지역의 운송업과 칫솔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정부·지자체·민간단체·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오고 있다.
▲기억에 남는 일화 중 하나가 1995년 7월 GS칼텍스(당시 호남정유)의 대형 유조선 씨프린스호 좌초 사건이다. 이 유조선은 태풍으로 인해 침몰하며 대규모 기름 유출 사고를 일으켜 심각한 해양 오염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약 6년간 어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LG그룹과 전남지사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저는 이를 중재하며 문제 해결에 힘썼다. 지역 주민들을 대표해 피해 복구와 지원을 위해 노력했으며, 정부에서도 고위 관계자들을 파견해 사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저는 전남지사에게 기업인들이 먼저 나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설득하며 협조를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을 해소하고 피해 복구를 돕는 데 일조해 기억에 남아있다.
또 광양제철소의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양 앞바다와 순천에 전신주를 설치해야 했었다. 당시 환경단체의 강한 반대가 있었고, 저는 언론사, 광양제철소와 협력하며 환경단체를 설득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광양제철소가 전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야 할 위기에 있었던 만큼, 이 일은 지역 경제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환경과 경제의 조화를 고민하며, 관계자들과 협력했던 순간이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북구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회장(1981~1997), 광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2004), 한국지역방송협회 회장(2006~2011),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부위원장(2006~2016), ACC 건립 추진 자문위원(2006~2008),
광주전남지역혁신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의장(2007), 제20~21대 광주상공회의소 회장(2009~2015),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조직위원회 후원회장(2010~2015),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자문위원(2011),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유치위원회 부위원장(2012~2019), 제18대 대통령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위원(2013), (재)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2009~2013), 광주세계김치축제 위원장(2017), (사)하남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2021~현재) 등 정부·지자체·기관 등에 도움을 주었고 특히 광주·전남 지역 발전에 최선을 다해왔다.
=사업을 시작과 함께 봉사·기부도 현재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어려운 시절이었던 당시 소년소녀가장이 곳곳에 있었다. 북구 바르게살기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그들의 어려운 처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이에 협의회는 북구 지역 250여 명의 소년소녀가장과 자매결연을 맺고, 임원 1인당 3~4명씩 돌보며 지원하기 시작했다. 저는 회장으로서 8명의 아이를 직접 돌봤고, 추가로 제 사비로 250여명 모두에게 쌀, 라면 등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며, 상반기에는 1인당 20만 원, 하반기에는 10만 원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다. 이 활동을 10여 년간 이어가며 아이들이 성장한 뒤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자신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고 말할 때, 저는 기부가 단순히 남을 돕는 행위가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길임을 깊이 깨달았다. 이 경험은 기부가 가져다주는 진정한 가치와 기쁨을 제게 가르쳐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뒤로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상임위원회 부회장(1995), 전남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장(2004~현재), (재)빛고을장학재단 이사(2003~현재), 전남대병원 발전후원회 회장(2004~현재), 광주은행 장학회 이사(2008~현재), (재)남도장학재단 이사(2010~현재), 제30대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회장(2018~2021) 등 별도의 임기 없이 봉사나 후원하는 직책을 2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9년 3월 둘째 아들과 함께 대한적십자사의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레드크로스 아너스 클럽(RCHC)’의 118, 119번째 회원으로 가입했다. 대를 이은 꾸준한 나눔을 통해 우리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고, 다른 분들께도 이런 선한 영향력이 미치길 바란다.
=10년간 지역민간방송사도 운영했다.
▲1990년 태영그룹이 정부 민영방송사업자로 선정되며 방송 허가를 받아 SBS가 탄생했다. 당시 각 지역에서도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공헌도가 높은 그룹과 회사들이 민영방송사업에 참여하고자 했는데, 모두 7개 그룹이 지배주주로 신청했다. 최종 결과는 대주그룹이 선정되었고, 저를 포함해 몇몇 사업자가 주주이사로 선임되었다. 저는 여기에 KBC 광주방송 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었다. 그 후 지배주주가 대신그룹으로 변경되었다가 2년 후 다시 럭키산업으로 재편되면서 2001년부터 2011년 12월까지 KBC 광주방송 대표이사로 재직했다. 제가 대표이사로 있는 동안 KBC 광주방송은 지역 MBC 19개사와 민영방송 10개사 중 매년 1~2위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흑자 경영을 유지했다. 인수 당시 방송사의 현금 자산은 약 120억 원이었으나, 지속적인 흑자 운영으로 146억 원에 방송사옥을 매입할 수 있었다. 또 약 350억 원을 투자해 아날로그 장비를 디지털로 전환하고, 지역 사회를 위한 미래지향적 프로그램 제작에 과감히 투자했다.
=전남대 최고경영자과정을 설립하는데 산파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1991년 전남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설립을 준비할 때 최한선 총장과 김종재 경영대학장이 저를 찾아왔다. 두 분은 이 과정이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설득하며 강의실과 강사 지원을 약속했다. 더불어, 제가 추천하는 인재들을 수용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경험 부족과 인맥의 한계를 이유로 학교가 주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며 망설였지만, 두 분의 거듭되는 설득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정치인을 배제한다는 제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면서 지역의 다양한 인사들 약 80명을 만났고, 이 중 26명으로 1기생을 구성했다. 광주시 부시장, 전남도 부지사, 경제·건설 분야의 주요 인사들, 문화예술계와 상공회의소 회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언론계와 금융계 인사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강의에는 전남대 교수진은 물론 서울의 유능한 교수들을 초빙해 수준 높은 특강이 진행되었다. 학생들 역시 각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성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며 유익한 정보를 나누는 장이 되었다. 저는 이와 함께 LG화학에 학교 발전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으며, 1994년 20억 원, 1995년 50억 원의 후원금을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전남대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고, 이 경험은 지금도 산·학·관 협력의 모범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지역농산물의 판로 확보에도 공헌했다고 하던데.
▲전라남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후원 물품 중 농산물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남은 전국에서도 청정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후원 내역을 살펴보니 90% 이상이 경기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후원 물품으로 사용하는 쌀을 무안, 고흥, 해남에서 생산된 전남산 쌀로 전환하고, 전남 각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전체 공급 물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도록 제도화했다. 이를 통해 전남 농산물이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되게 해 지역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힘썼다.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시절 여러 일화가 있다.
▲2004년 광주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지역 중소기업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느꼈고, 2009년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으면서는 이를 반드시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역 중소기업인들은 대기업이나 수도권의 기업들에 비해 정보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내 조선, 자동차, 전기, 철강산업, 금형, 금융, 인사, 노무 등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교수들을 약 3~4개월에 걸쳐 파악했다. 그 결과 약 340명의 교수님 명단을 작성한 후 이를 몇 차례 압축하여 최종적으로 26명을 선정했다. 이들 교수들은 광주·전남 지역 상공인들이 정보력 분석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의 기술력이 전국 동종 업계와 비교했을 때 상품의 질과 공정 과정에서 얼마나 미흡한지 파악하고, 글로벌 시장과의 비교를 통해 부족한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도록 조언해주었다. 특히 인사와 노무 분야에서의 약점이 사내 갈등과 송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상당해 이를 제도화하고 관리 시스템을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자문 교수 26명과 상공인들, 그리고 광주·전남 지역의 기업인들이 함께 논의하고 교류하며, 약 1년 뒤에는 산·학·관이 연결된 협력 체제가 성공적으로 구축되었다.
이와 함께 광주·전남지역에 위치한 대기업 제품과 부품의 70~80%가 수도권이나 타 지역에서 생산·가공되고 있었기 때문에, 본사 입장에서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 운송비 부담과 생산 효율 저하라는 문제가 지속되어 왔던 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역기업의 제품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달라고 요청, 규격이나 모델이 변경될 때마다 지역 제품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결과 현재는 대기업의 70% 이상이 지역 중소기업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2013년에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오랜 파업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도 참여했다. 사실상 광주 경제의 30%를 차지하는 공장의 파업은 지역 경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공장장과 노조원, 지역 의원들과 협력해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며, 분쟁을 해결하고 상생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지역 이미지와 경제를 회복하며, 상호 이해와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52년간 경제인으로 활동하며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 있다면.
▲첫 번째로 지역에서 우수한 농수산자원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통이 원활하지 못한 점이 아쉬워 이를 해결할 방안을 고민하다가 한국농수산물거래소 설치를 구상하게 되었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큰 농수산물거래소는 시카고에 위치하며, 농수산물 선물과 금 시장을 병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관련 교수와 상공회의소 직원 등과 함께 시카고를 방문해 정책과 시스템을 파악하고, 워싱턴과 LA까지 들러 영감을 얻고 돌아왔다. 마침 정부에서 농수산물거래소를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한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최종적으로 광주에 거래소가 들어서지 못해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광주은행을 지역 상공인들에게 돌려주지 못한 점 역시 아쉽다. 이 지역은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지역은행의 역할이 매우 크다.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및 실무 책임자들을 몇 차례 만나며 논의를 이어가고, 지속적으로 지역 발전을 위해 광주은행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광주은행은 경남은행이나 부산은행과 달리 지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약 13억원의 경비는 컨소시엄 구성원들이 분담해 처리했다. 당시 광주은행 노조에서도 일부 경비를 노조 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여러 차례 해왔지만 컨소시엄 업체의 경비로 충당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이후 JB금융그룹이 광주은행이 인수할 때 4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하나는 광주은행을 JB금융그룹에서 독립법인으로 운영해 줄 것, 다음이 광주은행 전직원들의 구조조정을 하지 말 것, 이어 이익의 50%는 광주지역을 위해 사용해 줄 것, 마지막 하나는 은행장은 광주 출신으로 임명해 줄 것 등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국가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순간순간보다는 먼 미래를 보며, 각 개인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변과 소통하고 공존하며, 공생하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최선을 다하면서 남 탓을 하기보다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 반드시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가꾸었으면 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가장 큰 재산은 자신의 마음인 듯하다. 물질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가 진정한 부자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떠나고, 지방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광주·전남이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새로운 도약을 이루려면 젊은 세대가 머물고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양질의 기업을 유치하고 지역 내에서 키워내는 것이다. 기업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다면 젊은이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희망을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젊은 세대가 꿈을 이루며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이며,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이유라고 믿는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1974년 주변의 권유로 광주새마을협의회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1년부터 16년간 북구 바르게살기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회 최우수회장상을 전국 최초로 연속 3회 수상하는 업적을 남겼다. 1995년 대한적십자사 상임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2025년 현재까지 20여 개의 봉사단체장이나 후원회 회장직을 맡아 조직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경선이나 경쟁 없이 오로지 권고와 추대로 직책을 맡으면서 조직 간 화합과 단결력을 높여 성과를 냈다. 문화·체육·장학·봉사·경제 등과 관련한 공적 업무를 주로 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사업을 챙길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상훈도 뒤따랐다. 1987년 10월 저축의날 동탑산업훈장을 시작으로 대통령 표창, 장관상, 광주시민대상, 우수중소기업인상, 대한적십자사 광무장 금장 등 20여 건에 이른다.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군 제대 후 바로 공직을 선택했다. 상사들의 따뜻한 배려와 직장 분위기 덕분에 정년까지 이어갈 계획이었지만, 결혼 후 자녀들이 생기면서 교육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젊었을 때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도전해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시작하기 전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 번째는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정직은 저의 철학이자 삶의 기본 원칙으로, 순간적인 이익보다는 신뢰가 장기적으로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만든다고 확신했다. 두 번째는 자산 범위 내에서만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은행 대출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자금을 빌리는 일도 지양하며, 철저히 제 자산에 맞춰 사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세 번째는 실패하더라도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하자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출발을 위한 전략으로, 위험을 줄이는 동시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사업이 성장하게 된 배경이 있다면.
▲자금과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활용품 도·소매업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1972년 12월 30일 ‘흥국상사’라는 이름으로 소박하게 사업을 시작했다. 앞서의 원칙을 지키며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상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준비했다. 사업 초기 걱정이 있었지만, 고객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매장을 직접 찾아주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서도 주문하는 고객들이 점점 늘어났다. 특히 회사에 재고가 없는 상품을 주문받은 경우 제가 직접 대리점 가격으로 구매하여 이익 없이 제공했더니, 고객들이 크게 만족했다. 순간적인 이익보다 고객과의 신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이를 지킨 노력이 소비자와의 신뢰를 더욱 견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밤낮없이 최선을 다했다.
=사업이 초기부터 자리잡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1973년 10월이었다. 벌써 52년 전의 일인데, 라디오 뉴스에서 석유파동으로 중동 산유국의 생산량 감소가 우리나라 같은 비산유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보도를 접했다. 마침 제가 취급하는 생활용품 중 석유제품과 연관이 있는 상품들이 상당했는데, 우선 재고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적해 두었던 자금과 비상금을 활용하여 껌, 파리모기약, 세탁세제 등 석유 관련 상품들을 판매하는 대리점, 출장소, 대형 약국, 공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가능한 전량 매입해 몇 곳에 나누어 보관했다. 두 달여가 지나자 이들 상품들의 가격이 급등하고 품절 현상까지 일어났다. 당시 대리점과 도매상들에게는 절반의 이익만 보고, 고객들에게는 기존 가격으로 제공하면서 고객들과의 신뢰를 한층 더 두텁게 쌓았다. 이것이 주변에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회사로 각인 시켜주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마치 몇십년의 긴 세월을 보낸 것처럼, 변화와 도전 그리고 새로운 경험들로 가득한 시기였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더 지혜롭고 단단하게 다듬어졌다.
=그 뒤에 대기업들의 광주·전남 총판을 시작했다.
▲그렇다. 도·소매업을 정리하고 제일제당·롯데 대리점, 서울유지 광주전남 총판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하였다. 사업영역도 광주에서 전남까지 확장하였고, 사무실과 창고, 자택을 겸한 건축물도 매입하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투자를 해 차량 4대를 추가 구입했으며, 경험이 풍부한 경력직을 채용한 뒤 3개월간 본사에서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첫 달부터 목표량을 초과 달성했으며, 본사와 거래처 간의 중간 역할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회사를 믿고 따랐으며, 그들이 오랜 시간 저와 함께 하며 안정적으로 사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삼양식품 상품 가운데 라면과 뽀빠이 과자의 인기가 매우 높았는데, 이 상품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것이 당시 영업의 핵심이었다. 광주에 모두 3곳의 삼양식품 대리점이 있었고, 그 중 한 곳의 점주가 개인 사정으로 대리점을 내놓으면서 본사가 공모를 실시했었다. 저를 포함해 모두 6곳이 참여하였는데, 5곳이 전국적으로 명망 있는 유통업체였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심사 결과 5개 항목 가운데 3개에서 경합 업체들을 압도하면서 최종 선정되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사업가, 시장 상인 대상 여론조사에서의 1위, 무차입 경영 방식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모든 상품이 고르게 매출이 오르면서 그해 전국 최우수 대리점으로 선정되었고, 부상으로 받은 400만 원과 공장 도매가보다 10% 할인된 가격으로 받은 라면 2,000박스를 다른 대리점들과 나누면서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전국 대리점 가운데 4명을 선발하여 본사 대표와 사업부장 등과 함께 회사 정책을 수립·최종 결정하는 전국 특별상담역에 선정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었고, 회사 역시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10월 지금의 럭키산업, 즉 제조업으로 업종을 변경했는데.
▲지금의 LG그룹이 나주의 호남비료 공장을 인수하면서, 해당 부지에 LG화학과 칫솔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주에서 생산하던 칫솔 품목도 함께 이전하며 외주업체를 선정하는데, 당시 LG그룹 회장께서 저를 추천했다. 그런데 이미 한국타이어, 천광유지비누, 기아자동차 납품업체들과의 계약해 월 임대료 1,500만 원에 달하는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고사했었다. 하지만 6개월 후 LG그룹 회장께서 재차 권유하셨다. 이에 “지금까지 주말도 없이 가족, 특히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도 거의 없었고, 특히 제조업은 경험이 없어 자신이 없다”고 솔직히 답했더니 그 회장께서는 “나도 집에서 가족들과 머무는 시간이 한 달 평균 7~8일에 불과하며, 국내외 출장으로 개인 시간도 거의 없지만 기업 경영은 그 자체로 사회에 큰 기여”라고 강조하셨다. 이어 “광주에서 200명 정도를 고용한다면 1년에 불우이웃돕기에 수천만 원을 기부하는 것보다 몇 배 더 훌륭한 애국자”라고 덧붙이셨다. 그러면서 “제조업을 하려면 직접 현장을 관리하고 문제를 해결·대처하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한데 적임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다시 해보라고 하셨다. 제가 얼마나 단순하고 경솔했는지를 깨닫고, 가까운 이익만을 좇았던 과오를 깊이 반성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려가서 시작하겠습니다”고 결심을 전했다. 이후 하남산업단지의 현 위치에 부지를 매입하고, 사업 상호를 ‘호남산업’으로 정해 제조업을 시작했다. 공장이 완공된 후 상호를 ‘럭키산업’으로 변경하였고, 그 이름으로 현재까지 40년 동안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2011년에는 베트남에 해외 지사인 ‘럭키비나’를 설립하며 글로벌 시장으로도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며 지금까지 사업을 이어올 수 있어 자부심을 느낀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웠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생활용품 유통판매업을 정리하려던 중 LG 본사 직원이 찾아와 생활용품 대리점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이후 본사 소장과 광주전남본부장까지 찾아와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이들은 조직 활용과 특별 지원을 약속하며 기회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결국 손해 볼 일이 없겠다는 판단으로 대리점을 맡기로 결정했다. 1976년 LG생활건강사업부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했지만, 초도 상품을 공급한 직후부터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거래처들로부터 “시중 가격보다 비싸다”는 항의가 쏟아졌고, 조사 결과 본사에서 4% 할인된 가격으로 공급했음에도 시중에서는 더 저렴한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손해를 감수하며 판매해야 했고, 거래처들은 제 개인과의 신뢰로 물건을 받아갔지만, 점점 부담이 커져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계약 후 3개월 만에 거래 정지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본사 사업부장이 직접 내려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지역의 총판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다. 저는 가격 문제 해결을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우며, 차별화된 제품 지원과 현 상황의 근본적인 해결을 약속받는다면 사업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종적으로 전남·북의 특판 총판만 맡기로 협의하며 새로운 조건으로 사업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간 막대한 손실을 보았지만 본사에서 약속한 지원을 성실히 이행해 주었고, 다양한 협력 방안을 제시하며 힘을 보태준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극복의 과정은 LG그룹과의 협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결과적으로 호남 지역의 운송업과 칫솔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정부·지자체·민간단체·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오고 있다.
▲기억에 남는 일화 중 하나가 1995년 7월 GS칼텍스(당시 호남정유)의 대형 유조선 씨프린스호 좌초 사건이다. 이 유조선은 태풍으로 인해 침몰하며 대규모 기름 유출 사고를 일으켜 심각한 해양 오염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약 6년간 어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LG그룹과 전남지사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저는 이를 중재하며 문제 해결에 힘썼다. 지역 주민들을 대표해 피해 복구와 지원을 위해 노력했으며, 정부에서도 고위 관계자들을 파견해 사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저는 전남지사에게 기업인들이 먼저 나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설득하며 협조를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을 해소하고 피해 복구를 돕는 데 일조해 기억에 남아있다.
또 광양제철소의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양 앞바다와 순천에 전신주를 설치해야 했었다. 당시 환경단체의 강한 반대가 있었고, 저는 언론사, 광양제철소와 협력하며 환경단체를 설득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광양제철소가 전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야 할 위기에 있었던 만큼, 이 일은 지역 경제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환경과 경제의 조화를 고민하며, 관계자들과 협력했던 순간이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북구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회장(1981~1997), 광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2004), 한국지역방송협회 회장(2006~2011),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부위원장(2006~2016), ACC 건립 추진 자문위원(2006~2008),
광주전남지역혁신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의장(2007), 제20~21대 광주상공회의소 회장(2009~2015),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조직위원회 후원회장(2010~2015),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자문위원(2011),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유치위원회 부위원장(2012~2019), 제18대 대통령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위원(2013), (재)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2009~2013), 광주세계김치축제 위원장(2017), (사)하남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2021~현재) 등 정부·지자체·기관 등에 도움을 주었고 특히 광주·전남 지역 발전에 최선을 다해왔다.
=사업을 시작과 함께 봉사·기부도 현재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어려운 시절이었던 당시 소년소녀가장이 곳곳에 있었다. 북구 바르게살기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그들의 어려운 처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이에 협의회는 북구 지역 250여 명의 소년소녀가장과 자매결연을 맺고, 임원 1인당 3~4명씩 돌보며 지원하기 시작했다. 저는 회장으로서 8명의 아이를 직접 돌봤고, 추가로 제 사비로 250여명 모두에게 쌀, 라면 등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며, 상반기에는 1인당 20만 원, 하반기에는 10만 원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다. 이 활동을 10여 년간 이어가며 아이들이 성장한 뒤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자신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고 말할 때, 저는 기부가 단순히 남을 돕는 행위가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길임을 깊이 깨달았다. 이 경험은 기부가 가져다주는 진정한 가치와 기쁨을 제게 가르쳐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뒤로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상임위원회 부회장(1995), 전남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장(2004~현재), (재)빛고을장학재단 이사(2003~현재), 전남대병원 발전후원회 회장(2004~현재), 광주은행 장학회 이사(2008~현재), (재)남도장학재단 이사(2010~현재), 제30대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회장(2018~2021) 등 별도의 임기 없이 봉사나 후원하는 직책을 2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9년 3월 둘째 아들과 함께 대한적십자사의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레드크로스 아너스 클럽(RCHC)’의 118, 119번째 회원으로 가입했다. 대를 이은 꾸준한 나눔을 통해 우리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고, 다른 분들께도 이런 선한 영향력이 미치길 바란다.
=10년간 지역민간방송사도 운영했다.
▲1990년 태영그룹이 정부 민영방송사업자로 선정되며 방송 허가를 받아 SBS가 탄생했다. 당시 각 지역에서도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공헌도가 높은 그룹과 회사들이 민영방송사업에 참여하고자 했는데, 모두 7개 그룹이 지배주주로 신청했다. 최종 결과는 대주그룹이 선정되었고, 저를 포함해 몇몇 사업자가 주주이사로 선임되었다. 저는 여기에 KBC 광주방송 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었다. 그 후 지배주주가 대신그룹으로 변경되었다가 2년 후 다시 럭키산업으로 재편되면서 2001년부터 2011년 12월까지 KBC 광주방송 대표이사로 재직했다. 제가 대표이사로 있는 동안 KBC 광주방송은 지역 MBC 19개사와 민영방송 10개사 중 매년 1~2위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흑자 경영을 유지했다. 인수 당시 방송사의 현금 자산은 약 120억 원이었으나, 지속적인 흑자 운영으로 146억 원에 방송사옥을 매입할 수 있었다. 또 약 350억 원을 투자해 아날로그 장비를 디지털로 전환하고, 지역 사회를 위한 미래지향적 프로그램 제작에 과감히 투자했다.
=전남대 최고경영자과정을 설립하는데 산파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1991년 전남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설립을 준비할 때 최한선 총장과 김종재 경영대학장이 저를 찾아왔다. 두 분은 이 과정이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설득하며 강의실과 강사 지원을 약속했다. 더불어, 제가 추천하는 인재들을 수용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경험 부족과 인맥의 한계를 이유로 학교가 주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며 망설였지만, 두 분의 거듭되는 설득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정치인을 배제한다는 제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면서 지역의 다양한 인사들 약 80명을 만났고, 이 중 26명으로 1기생을 구성했다. 광주시 부시장, 전남도 부지사, 경제·건설 분야의 주요 인사들, 문화예술계와 상공회의소 회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언론계와 금융계 인사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강의에는 전남대 교수진은 물론 서울의 유능한 교수들을 초빙해 수준 높은 특강이 진행되었다. 학생들 역시 각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성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며 유익한 정보를 나누는 장이 되었다. 저는 이와 함께 LG화학에 학교 발전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으며, 1994년 20억 원, 1995년 50억 원의 후원금을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전남대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고, 이 경험은 지금도 산·학·관 협력의 모범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지역농산물의 판로 확보에도 공헌했다고 하던데.
▲전라남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후원 물품 중 농산물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남은 전국에서도 청정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후원 내역을 살펴보니 90% 이상이 경기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후원 물품으로 사용하는 쌀을 무안, 고흥, 해남에서 생산된 전남산 쌀로 전환하고, 전남 각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전체 공급 물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도록 제도화했다. 이를 통해 전남 농산물이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되게 해 지역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힘썼다.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시절 여러 일화가 있다.
▲2004년 광주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지역 중소기업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느꼈고, 2009년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으면서는 이를 반드시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역 중소기업인들은 대기업이나 수도권의 기업들에 비해 정보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내 조선, 자동차, 전기, 철강산업, 금형, 금융, 인사, 노무 등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교수들을 약 3~4개월에 걸쳐 파악했다. 그 결과 약 340명의 교수님 명단을 작성한 후 이를 몇 차례 압축하여 최종적으로 26명을 선정했다. 이들 교수들은 광주·전남 지역 상공인들이 정보력 분석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의 기술력이 전국 동종 업계와 비교했을 때 상품의 질과 공정 과정에서 얼마나 미흡한지 파악하고, 글로벌 시장과의 비교를 통해 부족한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도록 조언해주었다. 특히 인사와 노무 분야에서의 약점이 사내 갈등과 송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상당해 이를 제도화하고 관리 시스템을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자문 교수 26명과 상공인들, 그리고 광주·전남 지역의 기업인들이 함께 논의하고 교류하며, 약 1년 뒤에는 산·학·관이 연결된 협력 체제가 성공적으로 구축되었다.
이와 함께 광주·전남지역에 위치한 대기업 제품과 부품의 70~80%가 수도권이나 타 지역에서 생산·가공되고 있었기 때문에, 본사 입장에서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 운송비 부담과 생산 효율 저하라는 문제가 지속되어 왔던 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역기업의 제품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달라고 요청, 규격이나 모델이 변경될 때마다 지역 제품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결과 현재는 대기업의 70% 이상이 지역 중소기업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2013년에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오랜 파업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도 참여했다. 사실상 광주 경제의 30%를 차지하는 공장의 파업은 지역 경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공장장과 노조원, 지역 의원들과 협력해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며, 분쟁을 해결하고 상생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지역 이미지와 경제를 회복하며, 상호 이해와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52년간 경제인으로 활동하며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 있다면.
▲첫 번째로 지역에서 우수한 농수산자원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통이 원활하지 못한 점이 아쉬워 이를 해결할 방안을 고민하다가 한국농수산물거래소 설치를 구상하게 되었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큰 농수산물거래소는 시카고에 위치하며, 농수산물 선물과 금 시장을 병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관련 교수와 상공회의소 직원 등과 함께 시카고를 방문해 정책과 시스템을 파악하고, 워싱턴과 LA까지 들러 영감을 얻고 돌아왔다. 마침 정부에서 농수산물거래소를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한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최종적으로 광주에 거래소가 들어서지 못해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광주은행을 지역 상공인들에게 돌려주지 못한 점 역시 아쉽다. 이 지역은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지역은행의 역할이 매우 크다.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및 실무 책임자들을 몇 차례 만나며 논의를 이어가고, 지속적으로 지역 발전을 위해 광주은행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광주은행은 경남은행이나 부산은행과 달리 지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약 13억원의 경비는 컨소시엄 구성원들이 분담해 처리했다. 당시 광주은행 노조에서도 일부 경비를 노조 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여러 차례 해왔지만 컨소시엄 업체의 경비로 충당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이후 JB금융그룹이 광주은행이 인수할 때 4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하나는 광주은행을 JB금융그룹에서 독립법인으로 운영해 줄 것, 다음이 광주은행 전직원들의 구조조정을 하지 말 것, 이어 이익의 50%는 광주지역을 위해 사용해 줄 것, 마지막 하나는 은행장은 광주 출신으로 임명해 줄 것 등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국가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순간순간보다는 먼 미래를 보며, 각 개인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변과 소통하고 공존하며, 공생하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최선을 다하면서 남 탓을 하기보다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 반드시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가꾸었으면 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가장 큰 재산은 자신의 마음인 듯하다. 물질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가 진정한 부자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떠나고, 지방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광주·전남이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새로운 도약을 이루려면 젊은 세대가 머물고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양질의 기업을 유치하고 지역 내에서 키워내는 것이다. 기업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다면 젊은이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희망을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젊은 세대가 꿈을 이루며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이며,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이유라고 믿는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