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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민으로 살아가기- 박진현 문화·예향담당 국장
2024년 06월 04일(화) 22:00
초여름의 길목인 지난달 중순, 국립광주박물관에는 삼삼오오 몰려드는 시민들로 활기가 넘쳤다. 평일 대낮인데도 박물관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런데 웬걸, 이들이 향한 곳은 전시장이 아닌, 박물관 본관 옆에 자리한 교육관이었다. 매월 격주로 오후 2시에 열리는 ‘광주박물관 대학’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올해로 34기를 맞는 박물관대학은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비디오아트 등 서양미술의 변천사를 조망하는 강좌다.

강의장으로 들어서자 객석을 가득 메운 100여 명이 열공중이었다. 얼핏 보니 30대 여성에서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70대 시니어까지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60대 중반인 손미라씨는 ‘우등생’로 불린다. 지난 2006년 박물관의 자원봉사자로 첫 인연을 맺은 그녀는 뒤늦게 ‘입문’한 미술의 세계에 푹 빠져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

미술관, 공연장 메운 ‘열공족’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 오전에는 광주예술의전당(GAC)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클래식과 유명인사들의 토크쇼를 접목한 GAC 기획공연 ‘11시 음악산책’이다. 흔히 공연장은 저녁에만 간다는 고정관념을 깬 마티네 콘서트다. 지난 3월 소설가 김영하가 진행한 ‘예술가의 클래식’ 콘서트는 그의 인기를 입증하듯 인터넷 예매 3분만에 500석이 매진돼 부라부랴 추가 좌석을 풀기도 했다. 이날 친구들과 함께 공연장을 찾는 주부 문정희(58)씨는 클래식 마니아인 김씨의 책과 음악,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GAC에 마티네 콘서트가 있다면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는 브런치콘서트가 있다. 지난 2015년 ACC가 개관한 이후부터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오전 11시 클래식, 국악, 재즈,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강의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차별화된 강사와 콘텐츠를 내세워 일반인은 물론 은퇴후 인생 2막을 맞은 액티브 시니어들의 예술 놀이터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1996년 탄생한 ‘카페 필로소피아’는 지역에서 보기 힘든 인문학 둥지다. 전남대 철학과 성진기 명예교수가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과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기 위해 꾸린 모임으로, 인문학 바람이 불기 훨씬 전부터 철학을 중심으로 문학, 역사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지난 2021년에는 창립 25주년을 기념해 은암미술관에서 심포지엄과 초창기 회원인 이근표·진경우·김해성 작가의 철학적 이미지를 담은 전시회를 개최해 화제를 모았다.

물론 이들 처럼 ‘공부파’만 있는 건 아니다. 미술과 음악 등 예술에 ‘눈을 뜨게 ’된 이후 문화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선 ‘행동파’들도 있다. 지난해 9월 지역의 미술애호가들이 주축이 된 ‘광주미술관회’가 주인공이다. 지난 2002년 광주시립미술관을 후원하기 위해 발족한 (사)광주미술관회가 전신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서포터즈인 (사)현대미술관회를 벤치마킹한 광주미술관회는 소아과의사 출신인 김영희(57)이사장을 필두로 미술, 음악, 여행 등 평소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전문직, 회사원, 주부, 미술인 등 5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비록 창립된지 1년도 안된 신생조직이지만 지난해 9월 광주시립미술관의 기획전에 참가한 ‘한희원 작가와의 대화’를 비롯해 해설이 있는 문화마실, 소장가와의 대화 등 창작자와 향유자를 잇는 다양한 현장을 마련했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공모한 ‘광주학생미술대전’에는 300여 명의 지원자들이 몰려 지역 문화계를 놀라게 했다.

89년 광주극장이 ‘버텨온’ 힘은?

지난달 말, 취재차 만난 ‘광주극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영화에 ‘미친’, 아니 광주극장를 애정하는 향유자들이었다. 1만3000여 명이 가입된 ‘광주극장’네이버카페 회원 가운데 ‘대표’로 나온 5명은 비록 나이와 직업은 다르지만 전국 유일의 단관이자 올해로 89살이 된 광주극장을 아끼는 마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특히 1만원 이상의 후원비를 내는 회원 440명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중에서도 연장자인 정애화(67)씨의 사연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10대 여고시절, 광주극장에서 처음으로 ‘벤허’, ‘쿼바디스’를 본 후 ‘덕후’가 된 그녀는 광주극장 홍보대사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일주일에 2~3일은 극장을 찾았고, 3일동안 개최된 광주극장 영화제 기간에는 매일 5~6편의 영화를 관람하느라 몸살이 날 정도였다. 해외여행중에도 광주극장의 ‘안부’가 궁금해 틈틈히 극장카페에 들락 거린다는 그녀는 지난 2002년 오랜 꿈이었던 광주극장을 주제로 3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21세기는 ‘문화’가 화두인 시대다. ACC, 광주대표도서관 등 화려한 건축물이 속속 들어서고 광주비엔날레, 월드뮤직페스티벌 등 빅 이벤트가 열리고 있지만 정작 문화를 향유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없으면 무늬만 문화도시일 뿐이다. 이제 문화는 더 이상 소수 애호가들만이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문화도시의 저력은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찾는, 시민들의 일상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