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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김향남 수필가
헤드라이트
2024년 04월 28일(일) 22:00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자꾸 시계를 흘끔거리다가 가만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왁자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홀로 빠져나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이 모처럼 회포를 푸는 자리가 아닌가. 어렵게 시간을 맞추고 의기투합하는 자리였는데 하필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는 거의 참석을 못 하거나 한다고 해도 중간쯤에나 갔다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얼굴이라도 봤으니 그게 어딘가. 툭툭 미련을 버렸다.

리조트 밖은 고요했다. 바다는 어둠에 잠겨 있고 그 끝에 불빛이 가물거렸다. 바닷가를 따라 정갈히 다듬어 놓은 길이 멀리까지 구부러져 돌아갔다. 나는 잠깐이라도 저 길을 좀 걸어볼까 하다 이내 관두었다. 대신 이다음 어느 날, 아직도 해가 중천에 있을 때쯤 이곳에 와서 밤이 깊도록 슬카장 놀다 가리라, 마음을 다독였다.

차를 찾아 주차장 쪽으로 가는데 건너편 언덕배기에 높이 솟은 건축물이 보였다. 서둘러 오느라고 미처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눈앞에 비상하는 새의 형상을 한 높다란 지붕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고 있었다. 아마도 최근 지어졌다는 그 음악당인 듯했다. 세계적인 규모라고 알려진 저 클래식 음악당은 예술의 도시를 꿈꾸며 일궈낸 이곳 사람들의 긍지이자 자부심일 것이다.

한려수도 아름다운 해안, 그 경관만 해도 이미 천혜의 명소라 할진대 저토록 근사하고 세련된 공연장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니, 참으로 환상적인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다음 어느 날, 저 음악당 객석에 앉아 감미롭고도 우아한 시간을 한량없이 누려 보리라.

나는 사뿐사뿐 주차장을 향해 갔다. 어둑어둑한 주차장엔 차들이 빼곡했다. 이 많은 차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내 차는 또 어디쯤에 있는 건지. 나는 기우뚱기우뚱 두리번두리번 차를 찾아 헤맸다. 어둠 탓이기도 하고 내가 신은 하이힐 탓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발아래 깔린 자갈들이었다. 아무리 살금살금 걸어도 무사히 통과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둘투둘한 바닥을 더듬어 겨우 차에 탔다.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맞추었다. 지금부터 좀 세게 밟으면 두 시간 후쯤엔 집에 도착할 것이고 씻자마자 바로 누우면 서너 시간은 잘 수 있을 것이다. 헤드라이트를 켰다. 빛은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불빛에 드러난 몇 개의 현수막이 뜬금없이 눈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강제수용 결사반대’, ‘단결 투쟁’ 굵게 흘려 쓴 붉은 구호들이 허름한 집들 사이에 넝마처럼 걸려 있었다. 그것은 혈서처럼 붉고 맹서처럼 굳건해 보였다. 담벼락엔 ‘민박집’이라고 써놓은 글귀가 멀뚱히 나부끼고, 그 뒤로 곧 헐려 나갈 듯 숨죽인 집들이 낮게 웅크리고 있었다. 검게 솟은 나무그림자가 지붕들을 덮고 그 틈새로 신음처럼 낮은 음조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이 아름다운 항구에 저토록 완강한 외침이라니. 사정이야 어찌 됐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난제들이 밤을 새워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앞을 막아선 붉은 구호들이 우르르 나를 에워싸는 듯싶었다. 갈 길 바쁜 나그네일망정 붙들고 하소연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느닷없이 억류당한 처지가 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방, 잘 닦인 산책로, 근사한 관람. 그런 것들이 어쩌면 저 구호들을 외면한 결과는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 비장한 도발에 뒷덜미를 잡힌 듯 쉽사리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다.

나는 한참이나 불빛에 비친 현수막과 낮은 지붕들, 그 위로 펼쳐진 푸른 날개를 눈으로 더듬어 보았다. 어스름 스산하고 적막한 붉고 검은 밤. 나는 쫓기듯 가속페달을 밟았다. 바퀴 아래서 자갈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