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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끈이 전부가 아니다 - 송민석 수필가·전 여천고 교장
2023년 10월 04일(수) 07:00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연고주의다. 학연·지연·혈연에 의한 연고주의는 공조직은 물론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지역 갈등과 패거리 문화를 조장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 돼왔다.

그중에서도 인위적 요소가 두드러진 것이 학연이다. 특정 대학을 중심으로 한 ‘패거리 문화’ 속에서 의사결정이 투명하게 될 리 없다. 채용과 승진 등 인사가 제대로 집행되지도 않고 자기 사람 키우기만 성행할 뿐이다. 정계, 관계, 교육계 등에서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특정 대학 출신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는 상위권 대학만 나오면 능력을 따지지 않고 그것만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학벌 중심 사회다. 전문대나 고교 졸업 정도로는 대졸자를 앞서가기 어려운 사회가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고졸 출신인 김대중과 노무현도 ‘대학 졸업장이 없다’라는 이유로 여러 곳에서 공격받았다. 이런 공격은 보수 세력에서만 터져 나온 것이 아니다. 진보도 그 지독한 엘리트 의식 때문에 두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학교에 가지 않은 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지도력, 능력, 자질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3월 당시 평검사들과의 대화에 나섰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붙은 노 전 대통령의 ‘학벌 콤플렉스’를 건드렸던 박 모 검사의 발언은 국민에게 많은 공분을 일으켰다. 노 대통령은 “오늘은 대통령의 약점을 건드리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답했고 이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주의는 동문 중심으로 뭉쳐 사회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지 오래다.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독점적, 배타적으로 정상적인 엘리트 순환을 방해한다. 특히 지방대 출신을 소외시켜 사회통합을 저해하기도 한다. 이런 풍토에서 창의적 인재가 길러질 수 있겠는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로 정주영 회장을 불러 “소학교 출신이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를 나온 직원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다루느냐”고 묻자 정 회장은 “신문대학을 나왔다”라고 답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

미국의 최고 갑부 400명 가운데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다. 이런 추세라면 학벌을 따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반드시 대학을 나와야 성공한 인생은 아니다.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은 80%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미국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40%를 조금 웃돈다. 미국인 10명 중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이 4년제 대학 졸업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미국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3위를 차지 한 대답은 ‘우리 부모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잘살고 있다’다. 1위는 등록금이 비싸서, 2위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라고 답하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가치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기준을 두는 학벌 중심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명문대는 아니더라도 ‘인(in)서울 대학’이라도 나와야 사람 대접 받는다는 풍조가 요즘 사회 전반에 가득하다.

인생에서 가방끈이 전부가 아니다. 명문대생이란 질풍노도의 시기에 남보다 학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거나 방황을 덜 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10대 후반에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어 평생 지속되는 사회는 야만적인 사회다.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고 있는 국제 경쟁 속에서 학벌이나 학력에 안주해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 선진사회가 되려면 ‘학력의 착시현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학벌주의 문화는 마땅히 타파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