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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잣대-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2년 09월 23일(금) 00:45
우리 지역에서 사회복지 현장과 이주민들, 그리고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이들이 문화와 생활 환경의 변화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통에 함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외와 가난 때문에, 나라와 언어가 다르고, 얼굴색이 다르다고 해서 겪게 되는 문화적인 충돌이나 이해의 충돌로 발생하는 차별과 폭력에 내몰리지 않도록 돕는 것은 당연하다.

소외의 현장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을 만나 그들이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례 관리를 통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이주민들이 사업주와 그 사회로부터 폭력과 차별이라는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철저한 이념 교육과 통제 사회를 탈출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우리 지역에 이주해 온 북한이탈주민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당연하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차별 대상인 이주민들,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북한이탈주민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고, 사랑받아야 할 이들이며, 사람이라면 누구도 제외될 수 없는 천부인권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과 시각은 고착되어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이들을 차별과 우월 의식으로 하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주민들과 북한이탈주민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을 자주 만나지만, 마음 안에서는 이미 하나의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시선은 많이 성숙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주민들이 점점 우리의 자리를 넘본다는 우려와 함께 놀라워하고 두려워하여 혐오의 목소리까지 나오기도 한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김무인은 ‘다문화 쇼크’라는 책에서 “한국 원주민이 느끼는 불안감의 근원과 그 불안감의 공격적 표출은 … 이주민들을 ‘타자화’(otherization)하며, 그들은 ‘우리’가 아닌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우리에 속하지 못하고, 그들의 문화에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마음이며, 함께 살아가지만 함께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원할 때 찾을 수 있는 ㄸㅗㅁ양꿍이나 쌀국수지만, 이 음식의 종주국 이주민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중 잣대’란 유사한 상황에 대해 각자 다른 지침이 불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이 개념은 모든 상황에 같은 지침이 적용되는 것이 이상적인 경우를 전제로 한다. ‘이중 잣대’의 단적인 예는 어떠한 규범(언어, 문장, 사회적 규범, 규칙)을 한쪽의 집단에 적용되는 것은 허용되고, 다른 한쪽의 집단에는 허용하지 않거나 금기시하는 경우다.

‘이중 잣대’의 의미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내로남불은 여러 분야에서 사용된다. 대립하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경쟁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경기 침체와 더불어 정치적인 불안과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와 무질서와 탐욕이 가득한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에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중 잣대’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가? 그 내면에는 공유·보편·나눔·희생보다는 독점·기득권 유지·거짓과 위선의 밀실 정치·철저한 탐욕의 정신 등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결국 ‘이중 잣대’는 서로를 파괴할 뿐이고 더 이상 공존과 상존은 불가능해진다. 수평적 관계는 없어질 것이고, 시작과 끝을 모르는 수직적 관계만 남아 서열과 폭력과 차별만이 있을 뿐이다.

마태오 복음 7장 12절에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이 ‘이중 잣대’의 시각을 지닌 이들에게 교훈이 되지 않을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차별과 서열, 그리고 폭력을 낳는 ‘이중 잣대’의 시각으로 더 이상 우리의 소중한 인간성을 파괴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