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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은 사은(謝恩)-강대석 시인
2022년 08월 31일(수) 02:00
영광 내산서원의 제향 행사에 가면 요즘도 가끔 부여, 논산 등지에서 노구를 이끌고 참석하시는 어르신분들을 뵐 수 있다. 바로 충남 일원에 사는 동토 윤순거(童土 尹舜擧,1696~1668) 선생(이하 존칭 생략)의 후손들이다. 이유는 내산서원에 배향된 수은 강항(1567~1618)과 그의 제자인 운순거를 참배하기 위해서이다.

동토 윤순거는 누구인가? 영광군수와 대사성을 지낸 팔송 윤황(八松 尹煌,1571~1639)의 아들로 수은 강항(이하 수은)과의 인연은 아버지 윤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수은과 윤황은 선조때 서인의 영수이자 대학자인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인이다. 수은은 159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좌랑을 지냈고, 성혼의 사위이기도 한 윤황은 1597년 알성시에 장원급제를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성을 지냈다. 그가 영광군수로 내려온 것은 광해군 2년(1609) 북청판관으로 재임 중 결혼한 자제를 관아에 데리고 살며 국고를 축낸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서였다.

그가 천리나 먼 낯선 땅 영광 고을에 부임했을 때 따뜻하게 맞아 준 이가 바로 수은이었다. 수은은 당시 일본에서 3년간의 포로 생활 후 귀환하여 고향인 영광 불갑에서 은거하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수은과 윤황의 우정은 영광 땅에서 더욱 깊어졌다. 수시로 시주(詩酒)를 함께하며 은둔의 고통과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서로 달랬다. 파주에서 살았던 윤황은 당시에 아들 다섯을 두고 있었다. 큰아들 훈거(15세), 둘째 순거(10세), 셋째 상거(7세), 넷째 문거(4세), 다섯째 선거(2세) 등이었다. 나중에 후처에게서 아들 셋을 더 두어 아호를 팔송(八松)이라 했다. 윤황은 수은의 학행(學行)을 잘 알기에 아들들을 차례로 수은의 문하에 맡겼다.

윤황이 영광군수를 그만두고 떠날 때 두 사람은 손을 놓지 못했다. 수은은 윤황의 뒷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나무에 맑은 서리 계절이 오고/ 가는 역정(驛程)에 해가 지누나/ 파산(坡山)과 우수(牛水)의 먼 거리에서/ 꿈결에나 서로 만나보리라” 하며 짙은 아쉬움을 시로 남겼다.

윤황의 아들 중에 스승에 대한 은혜를 뼛속 깊이 간직한 이는 둘째 윤순거였다. 윤순거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모두 합격한 후 인평대군 사부 등을 지낸 학자로 서예로도 이름이 높았다. 스승인 수은이 세상을 뜨자 손수 행장(行狀)을 짓고 개장할 때도 동생 윤선거(명재 윤증의 父)와 함께 만장(挽章)을 지어 애도했다.

그는 스승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았다. 금구현령으로 있을 때 수은이 남긴 왜국 포로 생활의 기록인 건거록(巾車錄)을 간양록(看羊錄)으로 이름을 바꿔 서문을 쓰고, 유고를 모아 수은집(睡隱集)을 간행했다. 그는 간양록으로 책명을 바꾼 이유를 “선생은 스스로 죄인이라 여겨 건거록이라 하였으나 제자들은 차마 스승을 죄인이라 할 수 없으니 간양록이라 한다”고 밝혔다. 간양(看羊)이란 한나라의 소무(蘇武)가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양(羊)을 돌봤다는 고사에서 빌린 것이다.

수은집의 간행으로 잊혔던 수은의 충절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자 현종은 곧바로 수은에게 이조참의를 제수했고 영조는 수은을 한소무(漢蘇武)와 같다고 칭송하며 그의 후손에게 벼슬을 내렸으며 고종은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증직했다.

윤순거의 스승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손들에게 유지를 남겨 외손 정시수(鄭時遂)와 정시대(鄭時大)가 고종 19년(1882) 영광군수와 영암군수로 부임하자 서로 합심하여 수은의 저서인 강감회요(綱鑑會要)를 목판으로 간판(刊板)하였다. 실로 200여 년을 이어 온 그의 유지가 외손들을 통해 실현된 것이었다. 강감회요 장판은 모두 642판으로 현재 불갑 내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윤순거가 내산서원에 배향되고 수은 후손들이 매년 제향을 올리는 이유이다.

윤황과 윤순거로부터 시작된 파평 윤씨 가문의 수은 선생과 인연의 끈은 4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어 배은망덕이 난무하는 세상에 또 다른 가르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