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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배상 문제로 시험대 오른 외교력-장필수 사회담당 편집국장
2022년 08월 09일(화) 22:00
지난 4일 광주시의회에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정신영(92)할머니가 ‘내 목숨 값 931원’이란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할머니는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일본연금기구가 자신의 통장으로 931원을 송금한 사실을 공개하며 “애들 과자값도 아니고…이걸로 일본 사람들 똥이나 닦으라”며 분개했다.

931원은 99엔을 우리 돈으로 환산한 것으로, 할머니가 일본에서 강제노동을 할 당시 받아야 했던 후생연금을 77년만에 액면가 그대로 보낸 것이다. 할머니는 열네살에 일본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에 끌려가 1년 넘게 노역에 시달렸지만 한푼도 받지 못했다. 노역기간 가입했던 후생연금의 탈퇴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수십년 지나 알고 신청했지만 일본 정부는 계속 거부하다 할머니가 내민 연금번호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인정했다.

일본 정부는 연금탈퇴 수당을 지급할때 화폐가치 변동에 따른 차액을 보전해 주는 규정을 일본인에겐 모두 적용했지만 정 할머니처럼 한국인 피해자들에겐 적용하지 않고 있다.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에는 양금덕 할머니에게도 99엔을 지급했다가 공분을 샀다. 그나마 당시 환율로는 1000원이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대법원의 자산매각 결정을 앞두고 한일 외교의 핵심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쓰비시 자산매각 결정에 촉각

대법원은 조만간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내 상표권과 특허권에 대한 자산매각(특별 현금화 명령)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전범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4년 전 대법원 판결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다. 이 판결을 이끌어낸 사람은 나주와 순천 출신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다. 이들은 10년동안 미쓰비시를 상대로 8차례나 소송을 제기했고 모두 승소했지만 미쓰비시가 위자료 지급을 미뤄 강제 자산매각을 통한 현금화 결정을 앞두게 됐다.

양금덕·김성주 할머니 사건이 주목받는 이유는 배상을 미루는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첫 자산 강제매각이란 점 때문이다. 이 사건 결정에 따라 소송중인 나머지 판결은 물론 한일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다보니 그동안 미동조차 하지않던 미쓰비시는 대법원에 자산매각 보류를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하고 선고를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문제는 우리 외교부의 태도다. 외교부도 미쓰비시와 비슷한 시기에 대법원에 의견서를 냈는데 민관협의회를 꾸려 일본과 교섭 노력을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자산이 강제 매각될 경우 일본의 보복이 우려된다고 은근히 재판부를 압박했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 복원을 위해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를 활용하는 듯 하다. 박진 외교부장관이 취임직후 일본에 건너가 ‘대법원의 현금화 결정 전 해법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한 것을 보면 일본 정부와 어느정도 입을 맞춘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저자세 외교 대신 국민 권익 우선해야

하지만 우리 정부의 이런 태도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물론 국민 정서와도 맞지 않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위자료 지급에 앞서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진정어린 사과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상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며 사과는 커녕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라며 뒷짐지고 있고 전범기업은 그 뒤에 숨어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됐다고 할때까지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발짝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런 마당에 우리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배상 문제가 한일 관계 복원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일본 눈치를 보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급기야 윤덕민 신임 주일대사는 8일 한국특파원 간담회에서 일본 기업에 대한 자산매각 결정이 이뤄지면 일본의 보복으로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몰려 수백조 원의 사업기회가 날아갈 수 있다는 발언으로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정부는 민관협의회를 통해 해법을 찾겠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은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고 피해자 지원단체들마저 최근 탈퇴해 동력을 상실했다. 강제동원 피해배상 문제를 풀겠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접근 방법이 틀렸다. 우리 사법부를 압박하고 피해자들을 달랠 것이 아니라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내는 외교력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라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bungy@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