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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 빠져드는 어른들-송기동 예향부장·편집국 부국장
2022년 06월 15일(수) 02:00
50대 K씨는 가끔 그림책 한 권을 펼쳐 든다. 책은 “해는 이글이글, 뜨겁다. 나무도 시들, 우리도 시들시들하다…”라는 짧은 문장과 함께 연주회장 모습으로 시작한다. ‘여름 1악장’ 책장을 넘기면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한여름 정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림 속 어린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서로 물 풍선을 던지고, 물총을 쏘며 논다. 호스를 든 꼬마는 공중으로 물을 뿌려 댄다.

이수지 작가의 ‘여름이 온다’(비룡소)의 도입부다. 작가는 새로운 그림책의 세계를 보여 준다. 기존 글과 그림 형식이 아닌 음악과 그림을 결합시켰다. 작가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중 ‘여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K씨 역시 비발디의 음악을 재생시켜 놓은 상태로 그림책을 읽는다. 1악장(너무 빠르지 않게), 2악장(느리게-빠르게), 3악장(빠르게)으로 구분된 그림책을 따라가다 보면 선율과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음악과 함께 책을 펼쳐 든 동안 K씨의 심란하던 마음도 어느새 소낙비가 몰아친 후 갠 하늘처럼 말끔해진다. 작가는 최근 ‘여름이 온다’로 볼로냐 라가치상(픽션 부문)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일러스트레이터 부문)을 수상했다.

그림책을 찾아 읽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주로 유아와 어린이들이 본다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그림책을 함께 읽고, 자신만의 그림책을 창작하는 새로운 문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어른들이 그림책에 마음을 빼앗기는 까닭은 뭘까?



권정생이 오월 광주에 보낸 편지

기자는 지인의 추천으로 ‘나는 기다립니다’(문학동네)를 본 후 그림책을 새롭게 대하게 됐다. 프랑스 작가 다비드 칼 리가 글을 쓰고, 세르주 블로크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나는 기다립니다. OOO을”에 맞게 붉은 실 한 올과 간결한 선만으로 인생 여정을 표현하는데, 무척이나 오랜 여운을 남긴다.

최근 고정순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그림책 ‘봄꿈’(길벗어린이)을 일부러 찾아 읽었다. 그림책은 ‘강아지똥’과 ‘몽실언니’ 등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1937~2007) 선생의 편지에서 비롯됐다. 선생은 1988년에야 ‘80년 5월’의 대표적인 사진을 지면에서 보게 됐다. 다섯 살 난 아들이 아버지의 영정을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그곳 광주의 슬픈 눈물을 감쪽같이 그렇게 모르고 있었다.…” 선생은 ‘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광주의 조천호 군에게’라는 제목의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는 못했다. 편지는 지난해 공개돼 33년만에 조천호 씨에게 전달됐고, 그림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림책은 5·18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마지막 장 영정 사진과 선생의 편지글에서 울림을 준다.

세상살이에 지친 어른 독자들은 그림책에서 위로와 치유를 얻는다. ‘육아가 힘들 때 그림책에게 배웁니다’(글담출판)를 펴낸 김주현 작가는 여는 글에서 “그림책은 무엇보다 천천히 내 속도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 좋았다”고 적었다.



신예 지역 작가 발굴 자양분으로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면 의외로 그림책 도서관과 그림책 관련 에세이집, 그림책 어른 독자들이 많다는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광주·전남에서는 광주 광산구 이야기꽃도서관과 순천 시립 그림책도서관을 비롯해 그림책 전문 책방 ‘예지 책방’이 운영되고 있다. 남구 양림동 ‘갤러리 포도나무’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그림책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광산구 신창동 예지책방에서는 ‘파자마 입고 그림책 한 잔’이라는 온라인 그림책 읽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그림책 작가에 도전하는 어른들도 늘고 있다. 광주 광산구 이야기꽃도서관과 순천 시립 그림책도서관 등지에서 그림책 창작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그림책 작가들의 등장은 신선한 소재와 그림 기법 등 새로운 그림책 세계를 보여 준다.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가들과 어른 독자층의 형성은 그림책의 프리즘을 다채롭게 만든다. 어른들이 그림책을 찾아 읽는 문화 트렌드 속에서 신예 지역 작가들이 발굴되고, 새로운 지역 문화가 형성되길 기대한다.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