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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바꾸는 1%의 마법-박진현 문화·예향 담당국장, 선임기자
2022년 05월 04일(수) 00:30
지난 2014년 이른 아침, 영국 런던의 패딩역에서 기차를 타고 게이츠헤드(Gateshead)로 향했다. 관광지도 아닌 옛 탄광도시를 찾은 건 세계적인 랜드마크로 유명한 ‘북쪽의 천사’(Angel of the North)를 ‘직관’하기 위해서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3시간 30분을 달려 게이츠헤드에 도착하자 에이톤 로지 언덕에 자리한 ‘북쪽의 천사’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높이 20m, 가로 52m, 무게 208톤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양쪽 날개를 편 조각상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1997년 세계적인 거장 안토니 곰리가 탄광촌에서 문화도시로의 비상을 꿈꾸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은 명불허전이었다. 탄생과 동시에 매년 유럽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간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밤에 피는 장미 ‘아마벨’

‘북쪽의 천사’와 달리 ‘축복받지 못한 채’ 태어난 공공 조형물도 많다. 서울 삼성동 포스코센터 앞에 세워진 미국 추상화가 프랭크 스텔라의 ‘꽃이 피는 구조물-아마벨(Amabel)’이 그중에 하나다. 고철 덩어리로 만든 9m 높이에 30톤 무게의 이 초대형 조형물은 생명 존중과 물질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비행기 잔해로 꽃을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1997년 베일을 벗은 철제 조형물은 하루아침에 동네북이 됐다. 예술성과 거리가 먼 고철덩어리라며 여기저기서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포스코는 작가와 협의해 철거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일부 미술 전문가들이 ‘상투적이지 않고 미학적으로 깊이가 있다’며 재고를 촉구하면서 존치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기에는 붉은빛의 야간 조명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한 포스코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2012년부터 야간 조명을 활용해 낮에는 쇠붙이지만 밤에는 환상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테헤란로의 명물로 변신시킨 것이다.

요즘 광주의 도심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공공 조형물들을 심심찮게 만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장소성과 예술성을 살려 도시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거리의 명작’은 손꼽을 정도다. 지난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을 수상한 뷰폴리·GD폴리가 문화수도의 아이콘이라면, 광주 수완호수공원의 ‘희망 우체통’, 광주 중앙초교의 폴리 ‘광주 사람들’, 예술의 거리의 조각상 등은 시민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9년 광주 광산구청이 예산 1억 원을 들여 설치한 7m 높이의 ‘희망 우체통’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희망을 전하는 메신저는 온데간데없고 문이 굳게 잠긴 내부에는 담배꽁초와 전단지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또한 21억 원의 예산을 들여 장성 남면에 설치한 광주 톨게이트의 미디어아트 조형물 ‘무등의 빛’(가로 74m, 폭 8m)도 ‘반쪽짜리’라는 지적이다.

지난 2019년 광주시는 서울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관문에 광주 출신의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조형물을 설치해 외지 방문객들로 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많은 광주시민들은 작품의 ‘존재’를 접하지 못한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광주톨게이트 한 곳에, 그것도 서울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방면에만 설치한 탓이다. 이 때문에 주로 동광주 톨게이트를 이용하는 시민이라면 수십억 원을 들인 미디어 아트 조형물을 볼 기회가 없다. 또한 광주 도심의 고층 빌딩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는 비슷비슷한 형상의 조각상들이 우후죽순처럼 설치돼 주민들에게 ‘예술적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공공 조형물, 선택과 집중을

수많은 예술 작품이 거리로 나오게 된 건 1972년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 삭막한 거리에 활력을 불어 넣고 척박한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돕기 위해 1만㎡ 이상 신·증축 건축물에 대해 건축비의 1%(현재는 0.7%)를 미술품으로 설치하도록 의무화했다. 그 결과, 135점에 불과했던 공공 조형물은 전국에 1만 9326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2022년 3월 기준 광주 전역에 설치된 공공 조형물도 197개에 달한다. 하지만 기획력과 사후 관리 미흡으로 일부 조형물이 방치되면서 되레 도시 미관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수명이 ‘영구적’이라는 것이다. 문화예술진흥법에는 조형물의 설치만 규정되어 있을 뿐 철거는 명시돼 있지 않아 방치된 상태로 파손될 때까지 존치된다. 주변의 건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하더라도 예술작품이라는 이유로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근래 미술계 일각에서 ‘미술품 생애 주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5년 이상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심사를 거쳐 작품을 존속시키거나 폐기하는 등의 사후 절차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길 위의 조형물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굳이 전시장을 찾지 않더라도 아파트 단지나 도심에서 예술의 향기가 짙은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이처럼 거리의 미술관은 도시를 화사하게 물들이기도 하지만 칙칙하게 만드는 두 얼굴을 지녔다. 그런 점에서 지금 문화 광주에게 필요한 건 선택과 집중이다. ‘잘 만든’ 공공 조형물은 도시의 품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자 랜드마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