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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의 어법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들에 대하여-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01월 17일(월) 03:00
기원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살았던 고르기아스는 말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당시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게 말하는 능력이 왜 중요한가를 묻는다. 여러 차례 문답 과정에서 고르기아스는 ‘말재주로 인한 설득력은 매우 탁월한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말의 설득력은 말에 담긴 진실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성 여부는 중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설득력은 듣는 사람들을 무조건 믿게 만들 때 생기는 것이니, 언어가 꼭 진실을 위한 방식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진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듣고 믿게 하는 것이 말을 하는 이유라고 역설한다. ‘말하는 기술과 요령’이 뛰어나다면 그걸로 충분하며, 참된 지식(에피스테메)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정의든 부정의든 말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믿게 하는 것이 말하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말하기의 최고 목적은 원하는 것을 손에 쥐는 것이며, 대화라고 하는 상호 행위는 실상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지배’를 위한 도구적 수단이다. 이런 대화법은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확증을 지식 또는 진실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게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좋은 것을 혼동하는 무지의 동굴에서 독백의 어법은 확고해진다. 무지의 횡포를 잘 아는 소크라테스로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얄팍한 말재주로 아는 것이 없는 자가 자신보다 더 모르는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더 큰 불행은 참된 지식과 진실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큰 권력을 얻는 것이다. 이런 언어 행위는 참된 지식을 냉소하고 무효화하며, 무지에서 나온 억측과 편향적 의견으로 무지의 악순환을 고착시킨다. 여기에서 특히 공적 언어 행위가 중요한 윤리적 가치와 공동체적 삶의 의미를 어떻게 내포하는가를 볼 수 있다. 그저 이해관계에 따른 맹종의 도구적 언사는 기껏해야 아첨 즉 ‘포퓰리즘’이며 선동이다.

우리의 언어 행위는 독백적 관계 또는 대화적 관계의 시작점이다. 고르기아스가 말하는 사람의 지배력을 위한 도구적 언어 행위는 겉은 대화이지만 실제는 독백이다. 독백에는 ‘어떻게’와 ‘왜’라는 물음이 없고, 일방적인 답과 분리와 부정의 단어들만 빼곡하며, 무엇보다도 독백에는 상대방이 없다. 상대방 즉 서로 다른 것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이 독백의 특징이다.

그러나 삶의 진리는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은 말한다. 삶이 요구하는 참된 가치를 생성하는 것은 늘 공동 생산 작업이며, 공유의 과정과 결과라는 의미다. 바흐친은 독백주의와 대화주의를 ‘나’와 타자와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구분한다. 독백의 주체는 변화를 거부하는 완결된 존재이다. 독백은 상대방의 고유한 타자성을 부정함으로써 하나의 시선과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세계다.

대화주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대화 행위를 공존의 의미와 가치가 생성되고 확인되는 성찰의 공간과 실천 행위로 이해한다. 따라서 타자성의 고유함을 수용하며 타인의 생각과 이해에 반응하고 통제 대신 상호적 관계를 추구한다. 바흐친이 “타자에게, 타자를 통해서, 그리고 타자의 도움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의해서만 나 자신이 된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삶의 영역이 독백주의의 횡포로 침윤되어 있는가.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인과 전문가라는 사람들 또한 그 유려한 말솜씨와 빈틈없는 논리와 흠잡을 데 없이 예리한 식견을 발판으로 독백의 어법을 견고하게 한다.

이 지독한 독백주의 세상에서 당연하게 우리는 안이 되고, 다른 모습과 생각을 가진 타인들은 밖이 된다. 지배 욕망과 독백주의로 뭉친 안에서 내다보는 밖은 늘 위험하고 혐오스럽고 통제되어야 할 곳이다. 하지만 안으로부터 규정된 모든 ‘바깥들’이 사라진 곳에는 고립과 의미의 해체와 증오와 원한의 반복이 있을 뿐, 무엇이 더 남을 것인가. 새해에는 부디 좀 더 대화적 상상력과 대화주의가 일상과 다양한 관계 방식에서 그리고 정치라는 긴 독백의 땅에서도 실현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