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과 책 읽고 건너가기] 1월의 책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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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과 책 읽고 건너가기] 1월의 책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나의 운명
2021년 02월 21일(일) 21:00
박은수 작 ‘인생은 여행’
모든 인간은 ‘나’이다. ‘우리’는 정해져도, ‘나’는 정해질 수 없다. ‘나’는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현재의 상태를 -깊이로든, 높이로든, 넓이로든, 의미로든 - 넘어서서 다음을 꿈꾼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진 ‘나’는 모두 여행자로 태어난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여행은 ‘건너가기’이다. 누구나 호기심이 마르면 멈추고, ‘우리’에 갇힌다. ‘우리’에 갇힌 자는 일상이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사실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무성영화 속의 조연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의지는 여행으로 실현된다.

여행의 한 형태가 독서다. 걸리버 자신은 여행자였지만, 걸리버를 만나는 자는 여행과 독서를 동시에 체득한다. 여행과 독서는 똑같이 나를 생경한 다른 환경으로 몰아넣고서 흔들리게 한 다음, 결국 나를 만나게 한다. 자기가 자기를 만난 자가 ‘자유로운 자’다.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자유롭다. 걸리버는 자유롭지 않을 “후손을 남기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자신을 만나지 않으면 인생에 성과를 내가 어렵다.

여행하게 하는 근본 동력은 내가 건너가서 생경함을 경험할 그곳을 동경하고야 마는 야생의 욕망이다. 걸리버는 야생의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걸리버의 가장 큰 장점은 매번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편안한 집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심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멈추지 못한다. “낯선 나라들을 보고 싶은 줄기찬 욕망 때문에 더 이상 체류할 수가 없었다.” 걸리버는 지난 여행에서 “겪은 불운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목마름”에 항상 들떠 있었다. “그 나라를 한번 둘러보면서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겠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크게 가진 여행자들은 인생에서 종종 낙오한다. “바다가 내 눈 앞에 다시 펼쳐졌을 때, 나는 선원들이 이미 보트에 올라타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낙오된 “나”를 놓고 떠나는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인생에서 준비된 낙오는 얼마나 빛나는 일인가. 고작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이라면, 무성영화 속의 조연이나 ‘그들 가운데 한 명’(one of them) 이상이 되기 어렵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본선 쪽”으로 노를 저었던 모든 성실한 자들은 낙오해야만 얻어지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성취를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본선”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그들은 잡풀이 “6미터” 이상을 자라고, “각 계단의 높이가 2미터”나 되고 “맨 위의 돌은 6미터”나 되는 거인국을 죽어도 경험할 수 없다.

떠나는 것이 다 여행은 아니다. 여행에서는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낯설어지거나 객관화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소득인데, 소득 없는 여행은 우주의 숭고한 두 축인 시간과 공간을 막무가내로 소비하는 것일 뿐이다. 어딘가로 떠나서 자신을 낯설게 하려는 인위적 활동은 그것 자체가 편안히 쉬고 싶은 감각과 출발 직전의 불안을 극복한 매우 지적인 활동이 아니겠는가. 여행은 강력한 지적 탐험이다. 당연히 걸리버에게는 이런 소양이 있었고, 또 이런 소양을 키우고 지킬 수 있는 진실성과 성실성이 있었다.

사업이 기울어도 “동료 의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비양심적인 행위를 따라”하지 못했다. 사업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비양심적인 행위도 주고받으며 사는 대오에서 과감히 이탈할 정도로 순도가 높은 양심을 가진 것이다. 양심은 자기를 자기로 지켜내는 힘이자 자유의 원천이다. 그는 “여가 시간이면 고대와 현대의 최고로 뛰어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자기를 섬긴 사람의 대표격인 돈키호테가 탐험에 나서기 전에 가장 먼저 재산을 팔아 책을 산 일과 겹친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양심이 있는 사람은 걸리버처럼 어디를 여행하든 그 나라의 언어나 풍습이나 기질에 관심을 둘 것이다.

걸리버보다 한 참이나 작은 사람들도 양심을 귀하게 다룬다. 신용은 양심의 한 양식이다. 소인국의 “그들은 사기 역시 사형으로 다스린다. 사기를 절도보다 더 무거운 범죄로 보기 때문이다.” 걸리버는 “거액의 어음을 가지고 그대로 달아나서 주인에게 손해를 입힌 자”를 위해 황제에게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는 신용을 위반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키만 멀대같이 큰 걸리버는 여기서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낸다. “황제는 죄를 더 악화시키는 사유를 정상 참작의 사유로 들고 있는” 걸리버를 “참으로 한심스럽게 생각”했다.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는 후보의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더 중시하는”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지에 의해 저지른 오류는 공공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경향이 있는 데다 그 자신의 부패한 심성을 숨기고, 돋보이게 하고, 옹호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고의적인 술수는 공공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이 말을 듣고 걸리버는 “그때 정말 부끄러웠다는 것을” 고백한다. 인간이 인간의 격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염치는 살아있었다. 염치만 살아있어도 인간은 고꾸라지지 않고 다음 ‘여행’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서버린다. 여행도 불가능하고, 건너가기도 불가능해진다. 생각하기보다는 정해진 믿음에 갇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를 빗댄 것이지만, 릴리펏과 블레푸스쿠 두 강대국은 “지난 36개월 동안에 아주 끈덕지게 서로 전쟁을 해왔”는데 “그 전쟁의 발단은” “달걀을 먹기 전에 그것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위쪽의 넓은 부분을 깨서” 먹느냐 아니면 “달걀의 밑 부분, 갸름한 부분”을 깨서 먹느냐의 믿음의 차이이다. 장기간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게 하는 일이 고작 계란의 윗부분이냐 아랫부분이냐의 사소한 문제이다.

작은 문제가 목숨을 걸 정도의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의 양심이 원초적 율동감을 잃고 그 사소한 문제만큼 작게 굳어졌기 때문이다. 양심의 원초적 율동감이 사라지면 여행은 불가능해진다. 한자리에 멈춰선 채 진영에 갇혀 굳건한 ‘우리’를 만든 다음 끼리끼리 공유하는 믿음에 기대 살 뿐이다. 다 각자가 자신들만의 믿음으로 의미를 정해버린 결과지만, 정작 예언자는 교리에서 “진정한 신자들은 그들에게 편리한 쪽을 택하여 달걀을 깨도록 하라”고 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영국 사람 걸리버는 300년도 전에 어떻게 알았을까?

양심은 자체에 소장하고 있는 호기심을 토대로 해서 점점 지적으로 단련되어야 굳지 않는다. 단련은 양심이 ‘다음’을 도모하는 자세로 부단히 건너가려고 스스로 ‘질문’하는 지적 활동이다. 이 지적 활동이 결여된 양심은 “선량하지만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하여 “통치 기술을 아주 비좁은 범위로 제한”한다. “이런 결점은 무지로부터 생겨난다.” 무지한 사회는 “정치를 학문으로 만들어놓지” 못한다. 정치를 지적으로 대하지 않고, 감정이나 감각으로만 대한다는 뜻이다. 이러면 “기계 기술의 향상에만” 관심을 두지,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관념이라든지, 존재, 추상 및 초월 같은 개념은 아무리 해도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양심이 지적으로 정련되지 않으면, 기능이나 기술의 단계에 머물지, 과학이나 철학의 높이로는 상승할 수 없다. 이런 수준에서는 자연과의 투쟁에서도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내고, 더 나아가 불만과 번민의 문제를 유도하는 것”과 같이 “근거 없는” 투쟁에 시간과 정력을 다 쓰고, 정작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추상과 초월의 관념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다. 릴리펏과 블레푸스쿠처럼 두 진영으로 나뉘어 생각을 포기한 채 진영의 신념만을 앵무새처럼 떠들 뿐이다.

양심이 깨어있는 자만 여행할 수 있다. 양심을 굳지 않게 하려면 항상 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긴장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금방 죽는다는 사실을 체득해야 유지된다. 죽음을 자기 자신의 일로 인식하지 않으면 사람은 풀기 없이 푹 퍼져버린다. “절대 죽지 않는다는 끔찍한 전망”은 많은 결점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역정을 잘 내고, 탐욕스럽고, 심술궂고, 자만심이 상하고, 수다스러울 뿐만 아니라 남들과 친분을 쌓지도 못하고, 모든 자연적인 애정에 무관심”하다.

무엇보다도 어떤 일에나 “전혀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건너가기란 전혀 불가능해진다. “죽지 않는 그들이 온 나라를 그들의 손아귀에 거머쥐고 국가 권력을 독점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욕심만 많았지 관리능력은 거의 없으므로 필경에는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 것이다.” 양심이 굳어 여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하다. 정치하려는 자는 마음속에 여행을 꿈꾸는 양심이 준비되어 있는지부터 점검하라.

호기심으로 채워진 양심을 깨워 여행을 다니면 종내에는 깨달음에 이르러 “자연의 완성”인 “흐이늠”을 만나게 된다. 누구에게나 여기가 여행의 순수 절정이나 최종 목적지로 보일 수 있다. 걸리버도 “타락한 인간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저 훌륭한 네발 동물의 많은 미덕으로 인해 진정한 지혜에 눈을 떴다.” 순수 절정에 이르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운명”을 부여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그 순수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한다. “태어난 곳”에서 함께 살았던 “동족의 명예는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종 지혜”는 비록 순수 절정의 이미지를 갖지만, 거기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지혜”는 “고향으로 헤엄쳐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이 말은 “건너가기를 멈추지 말라!”는 명령이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존재의 운명”임을 각성시키는 죽비이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깨달은 자의 ‘하산’(下山)이다. “절망적인 운명”에서 도망쳐서 순수 절정을 만난 후, 다시 하산하여 “절망적인 운명”에 용기 있게 맞서는 ‘여행자’라야 ‘여행의 완성자’이며 ‘건너가기’의 실행자이다. 이토록 길고 고단한 운명적인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여행자를 지치지 않고 살아있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 걸리버에게서 그것은 “영국의 야후 사회를 어떻게든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보려는 소망”이었다. 아하! 결국은 소망이구나!

※철학자 최진석 교수와 함께 읽는 2월의 책은 ‘이솝 우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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