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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쇼네바이데에서
2019년 12월 10일(화) 04:50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엊그제 베를린 남동부의 쇼네바이데를 찾았다. 어김없이 초겨울의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나치 강제노동 기록센터는 방문객들을 차분하게 맞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치 치하 강제노동 및 2000년 이후에 시작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실태에 관한 상설 전시, 그리고 2차대전 말기에 이루어진 이탈리아 주민들에 대한 강제노동에 관한 특별 전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과거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물론 이 전시는 얼마 전에 있었던 한·일 간 지소미아 종료 문제와 대비되면서 나에게 착잡함을 더해 주었지만,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기록센터는 베를린에 있었던 3000개의 강제노동 수용소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 부지에 자리 잡은 것으로, 근래에 만들어진 ‘테러의 지형 재단’이 운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나치의 강제노동 수용소를 말할 때면 항상 아우슈비츠나 작센하우젠, 다카우, 부헨발트와 같은 유명한 절멸 수용소들을 떠올리지만, 나치 독일이 만들었던 강제노동 수용소는 이런 극단적인 유형뿐 아니라 훨씬 더 일상적이고 많았던 강제노동 수용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이 기록센터는 일반 주택가에 자리 잡고 단층짜리 건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일부 건물에는 이탈리아의 젊은 군속들이 연행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1944년 초에 이렇게 강제 연행되어 강제노동을 하던 사람들이 베를린에만 42만 명이나 되었다. 2006년 건물들이 수리되어 전시관 및 기록센터로 개관하였다.

1945년 5월,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나치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있었던 2600만 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멸 수용소 생존자를 제외하고 약 1137만 명이었고, 소련에만 355만 명이 생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독일로 강제로 연행되어 왔으며, 독일의 각종 공장에서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필요했던 생활필수품들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임시 주거시설에서 열악한 생활을 했다.

나치하에서 자행된 각종 인권침해에 대한 서독의 배상은 이스라엘에 30억 마르크, 유태인회의체에 4억 5천만 마르크를 지불한 것이 시초였다. 나치 피해의 문제는 일찍부터 가장 끔찍했던 홀로코스트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너무 부각되다 보니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문제나 나치 군대에 관한 문제는 금기 또는 침묵하는 문제로 남아 있었다. 강제노동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1953년 런던 합의에서 제기되었으나 오랫동안 법적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었다.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에 보상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 2+4의 방식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 기업들의 강제노동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다시 부상하였다. BMW에서 강제로 일했던 노동자들이 배상을 요구하자 독일 정부는 법치주의의 원칙이 지켜진다면 보상할 수 있다고 응답하였는데, 특히 미국에서 전개된 독일의 전범기업 보이콧 운동이 결정적이었다. 1998년 독일의 정당들이 강제노동 보상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2000년에 법률을 제정하였다. 독일 연방정부가 50%, 기업들이 50%를 출연하여 총 100억 마르크의 기금을 마련하고 기억책임미래재단을 설립하였다.

2001년 5월부터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개별 보상이 시작되었는데, 2007년까지 총 98개국의 피해자, 166만 명 이상이 보상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85만 명, 폴란드에서 48만 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실제 보상 과정은 복잡했다. A범주는 절멸 수용소나 감옥이나 게토의 노동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인데 전자에게는 7669유로, 후자에게는 3068유로에서 7669유로까지 보상되었다. B범주는 강제노동 수용소나 각 기업에서 강제노동을 한 사람들로 2556유로씩 보상되었고, 농업 부문에서 강제노동을 한 사람들에게는 536유로에서 2200유로까지 지급하였다. 물론 많은 희생자들에게 그 보상은 늦은 것이었고 보상금은 많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동유럽 가난한 나라들의 피해자들에게는 상당한 금액으로 간주되었다.

쇼네바이데에서 다시 한 번, 과거를 직시하고 또 과거와 화해하는 방식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참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린의 크리스마스는 우리보다 빨리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