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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유럽 예술기행 <6> 이탈리아 -피렌체
단테가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만났던 베키오 다리.
2018년 11월 26일(월) 14:56
열차는 피사 역을 지나치고 있다. 피렌체까지는 1시간 반을 더 가야 한다. 주관적이겠지만 피렌체는 내게 두 개의 단어를 먼저 연상시킨다. ‘신곡(神曲)’의 단테와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가의 메디치(Medici)는 약사(藥師)를 뜻하는 ‘메디코’에서 유래한 말이다. 메디치가는 제약업으로 재산을 모은 뒤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해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세 명의 교황과 피렌체의 통치자들을 배출한 명문가다. 르네상스 예술의 대부였던 로렌조 데 메디치는 단연 불세출의 인물이다.

피렌체는 13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밀라노, 로마와 비교해서 아주 작은 도시였다. 그런데 상인들의 경제적 번영 덕분에 피렌체는 화려하게 도약했다. 십자군 원정 이후 14세기의 피렌체 상인들은 영국과 벨기에 등에서 양모를 수입하여 모직옷감을 수출했다. 그 결과 피렌체는 부유해지고 은행지점들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무역이 활성화되어 피렌체의 돈인 플로린은 요즘의 유로화처럼 유럽의 공용화폐가 되었고, 송금과 어음이 자유로운 은행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피렌체의 은행업은 15세기 코시모 데 메디치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더불어 정치적 혼란도 종식된다. 코시모는 피렌체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모으고 만들라고 지시한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 예술을 격발시킨 단초였다. 코시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단테 750주년에 스테판 모크루브 작가가 기증한 단테 청동상.



단테가 태어났으며 첫사랑의 시를 썼던 생가 단테하우스.



산타 크로체 성당 옆에 세워진 단테 입상.







“나는 피렌체의 기분을 잘 안다. 우리들 메디치가 쫓겨나는 날이 온다면 5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건은 남는다.”

코시모가 남긴 것은 건축물이나 회화, 조각, 고사본 같은 유물만이 아니었다. 인문학자인 피치아노에게 자신의 별장을 주어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연구케 하고, 산 로렌조 성당의 개축비용을 지원하고,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다.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 즉 플라톤 아카데미를 창립하여 피렌체가 고전 연구의 중심이 되게 한 것도 그였다.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피렌체대학에서는 최초로 ‘호메로스’ 인쇄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공화정 통치자인 코시모가 르네상스 예술의 기반을 닦았다. 손자인 로렌조는 왕정체제로 복귀해서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해 경제는 더욱 융성해지고, 그 힘으로 르네상스 예술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특히 로렌조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만능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발견하고 후원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코시모가 피사대학을 설립하여 석학들을 우대했다면 로렌조는 소년 기능교육에 관심이 많아 메디치 궁 옆에 학교를 지어 소장하던 고대 흉상과 많은 그림들을 빌려주고 학교정원에 신상들을 조각하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늙은 목신의 두상을 조각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솜씨를 우연히 발견하고 양자로 삼는다. 그를 메디치가 사람으로 편입시켜 조각과 그림에만 전념케 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빈치 출생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로렌조의 후원을 받았다. 피렌체에 있는 베로키오 작업실에서 범상치 않은 솜씨로 일하던 12살의 다빈치도 로렌조의 눈에 띄었다. 로렌조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이 선친의 기마상을 조각할 사람을 찾자 다빈치를 추천해 그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피렌체 역에 내리자마자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다. 역에서 가까운 마르까또 시장에 들른다. 가죽제품 가게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비가 더 세게 내릴지 모르므로 우산을 하나 살 수밖에 없다. 우산을 펴자 성당 사진이 인쇄돼 있다. 피렌체에는 12개의 성당이 있다고 들었다. 그중에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은 성당도 있다. 대부분의 피렌체 명소와 유물은 메디치가와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다고 한다. 우산을 쓰고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피렌체의 랜드 마크로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피렌체 두오모’라고도 부르는데, 세례당인 바티스테로 디 산 조반니와 조토의 작품인 종탑으로 이루어진 성당이다. 13세기 말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가 설계를 맡아 시작하여 필리보 브루넬리크키(1377-1446)가 거대한 팔각 돔을 올림으로써 완공돼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이 된 것이다. 그리고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년)는 평생토록 종탑을 지었으며 안드레아 피사노(1270~1348년)는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사에 매달렸다고 전해진다.

대성당 정면의 모습은 고딕양식답게 뾰쪽한 첨탑의 무리가 허공으로 솟구쳐 있다. 마치 사람들의 비원을 천상에 전해줄 것만 같다. 거기에다 흰색 대리석에 검은색 대리석을 기하학적으로 상감한 문양이 순례자들을 감탄케 한다. 조토의 종탑은 피사의 사탑과 비교해 볼 때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마치 우리나라 다보탑이 피사의 사탑이라면 조토의 종탑은 석가탑 같은 느낌이다. 입장권을 구입해도 한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니 단테의 입상이 서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가본다.

산타 크로체 성당의 별칭은 ‘천재들의 무덤 성당’이란다. 단테,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석관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곳으로 가는 것은 단테의 입상을 보기 위해서이지 다른 목적은 없다. 때마침 비가 그쳐 하늘이 푸르러지고 있다. 생전의 단테는 어떻게 생겼을까 몹시 궁금하다. 가는 길에 시청 앞 시뇨리아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다비드상(복제품)을 한참 동안 감상하고 카메라에 담는다. 다비드상의 모델은 미남으로 손꼽히던 요절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란다. 미술사 사전은 골리앗에 맞선 20세 안팎의 청년 다윗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긴장한 미소년의 얼굴표정, 힘줄이 드러난 손등, 순정한 남근 등 사실적인 표현에 경외감이 든다.

스파게티로 점심을 한 뒤 드디어 단테 입상 앞에 선다. 네 마리의 사자가 기단에서 단테를 호위하고 있는 듯하다. 독수리 한 마리는 단테의 망토 자락 옆에서 날카로운 부리를 쳐들고 있다. 매부리코를 가진 단테의 인상은 뜻밖에도 차갑다.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느낌이다. 피렌체인의 기질이 드러난 것 같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기주장과 비판정신이 드셌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질이 오히려 학문과 예술을 발달하게 한 동력이었을 터이다.

이윽고 약도를 펴들고서 단테의 생가인 단테하우스를 찾는다. 몇 개의 골목을 들락거린 끝에 단테의 생가 앞에 선다. 생각보다 사람들의 출입이 드물다. 장식이 없는 벽돌건물은 몰락한 귀족의 집답다. 8세에 어머니를 잃고 16세에 임대과 대부업을 하던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단테는 가장 노릇을 한다. 조숙했던 단테는 10세에 베아트리체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첫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9년 후 단테는 베키오다리 부근에서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만나지만 두 사람 모두 결혼한 상태였다. 그날부터 단테는 첫사랑 베아트리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랑의 시를 쓴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1295)이란 책을 낸다. 이후 5년 뒤, 단테는 피렌체의 약제사 조합에 가입하면서 뛰어난 언변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단테는 피렌체 행정부 최고위원 3인 중 1인이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단테는 정쟁에 휘말린다. 로마로 떠났을 때 뇌물 및 각종 비리로 기소되어 궐석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는다. 단테는 귀향을 포기하고 사망할 때까지 타향을 전전한다. 단테의 최고의 걸작인 ‘신곡’은 이때 쓴 작품이다.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으로 구성된 ‘신곡’은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지방어로 쓰였기 때문에 더욱 평가를 받는다. 단테의 인생을 “단테 알리기에리의 생애는 마치 거칠고 요동하는 시와 같다. ‘천국’은 언강생심이고 ‘연옥’보다도 ‘지옥’에 더 가깝다.”라고 평한 문학평론가 헤럴드 블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단테하우스 5층까지 오르는데 단테 침대와 그의 청동상이 눈에 띈다. 청동상은 2016년 6월 16일에 러시아 조각가 스테판 모크루브가 단테 750주년을 기념하여 기증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신곡’을 설명하는 세 장의 포스터를 보고는 놀라고 만다. ‘신곡’의 원제가 ‘코메디아’(La Comedia)다! 학창시절에 이해하지 못했던 ‘신곡’의 일부가 원제만 보고도 비로소 이해됐기 때문이다. ‘신곡’ 지옥 편 제4곡(曲)을 보면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등이 예수 이전에 태어나 세례를 받지 못했으므로 지옥에 가 있는데 그 자체가 희극(코메디아)인 것이다. 5층에서 보니 조토의 종탑이 보인다. 지척인데 헤맨 셈이다.

이제는 메디치 가문이 남긴 르네상스 유물들을 느긋하게 감상하리라. 코시모의 명으로 지어진 공화정 청사가 지금은 우피치미술관인 바 문화대국을 지향한 메디치가의 정신과 마주하고 싶다. 우피치미술관은 제국주의적인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처럼 적어도 약소국의 약탈품을 전시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베키오다리 건너편의 피티궁전도 가보리라.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등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고 하니까.

/글·사진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