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예술제 70년] “호남예술제는 미술인생 시작점 … 자부심 그 자체”
  전체메뉴
[호남예술제 70년] “호남예술제는 미술인생 시작점 … 자부심 그 자체”
<8>호남예술제를 빛낸 예술가 - 화가들
황영성·강연균·우제길 작가 등
호남 미술 텃밭 풍성하게 일궈
‘비엔날레의 도시’ 도약 발판
남도 대표 미술제로 입상 큰 의미
학생간, 학교간 경쟁도 치열해
학생들 높은 꿈 꾸는 버팀목 되길
2025년 06월 12일(목) 19:50
강연균 작가
호남예술제는 그동안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를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의 역할을 해 왔다. 어린 시절 예술가의 꿈을 꾸었던 새싹들은 세월이 흘러 예술가로, 교육자로, 지도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음악, 미술, 문학, 무용, 국악 등 다양한 부문의 경연을 거쳐 간 60만 명의 참가자들은 호남예술제의 산증인들이다. 이들의 활약과 열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70년의 역사 속에서 미술 작가들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오늘날 광주가 비엔날레의 도시, 미술의 도시로 도약하기까지는 지역민들의 성원과 문화행정 외에도 많은 미술인들의 열정과 눈부신 창작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황영성, 강연균, 우제길, 최영훈, 진원장, 국중효, 나상옥, 송필용, 김해성, 조강훈 등은 호남예술제가 배출한 작가들이다. 자신만의 개성적인 창작활동으로 예술 세계를 열어왔던 이들은 지역 미술을 넘어 호남 미술의 텃밭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일궈왔다.

최영훈 작가
수채화를 통한 회화적 완성에 주목하며 다채로운 주제를 구현해왔던 강연균 화백은 호남예술제가 배출한 예술가다. 고등학교 시절 참가한 예술제에서 특선을 수상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 오지호 화백이었다.

얼마 전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강 화백은 지난 1960년 열렸던 제5회 대회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집에서 화실까지 30분간을 걸어 매일 출근한다는 그는 “호남예술제 초창기는 초등학생 위주의 경연대회였다. 저는 ‘중고등부’로 대회가 확대돼 치러졌을 때 처음 참가해 특선을 받았다”며 “당시 전남대학교에서 사생대회가 열려 캠퍼스 풍경을 그렸던 기억이 여전히 새롭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호남에서 가장 큰 예술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후일 작가생활을 하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됐다”며 “당시는 지금의 호남예술제와는 영향력과 규모 등에서 차원이 달랐다”고 회고했다.

광주시립미술관장을 역임했던 최영훈 화백은 호남 예술제와 관련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다. 그는 호남예술제 전신인 제1회 어린이 사생대회부터 참여했다. 중고교시절은 거의 매회 대회에 참여할 만큼, 호남예술제는 그의 학창시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초등학교 3학년 때 참여했던 예술제는 잊을 수 없다. 어린 시절의 ‘최영훈’을 떠올릴 수 있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사직공원에서 미술 사생대회가 열린 날이었죠. 광주시내 초등학생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어요. 당시 사직공원 인근 양림동은 선교사들 집이 많았습니다. 이색적인 풍경을 그리기 위해 학생들 몇 명이 담을 넘어가 그림을 그렸는데 저도 그 중에 끼어 있었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어디선가 개(셰퍼드)가 짖으며 쫓아오는 것이었어요. 허겁지겁 도망을 치다 그만 신발을 잃어버렸는데 인솔 선생님한테 많이 혼났던 기억이 납니다.”

진원장 작가
진원장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을 통해 미술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그의 미술 인생의 시작은 호남예술제였다. “지역에서 개최하는 대회는 호남예술제와 조선대 실기대회가 있었다”며 “호남예술제는 특히 학교 간 경쟁의 의미도 있어 치열했다”고 한다.

그는 “70년을 쉬지 않고 경연을 이끌어온 것은 광주일보의 저력을 보여준다”며 “앞으로도 예술 꿈나무들의 튼실한 등용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국중효 작가
고등학교 재학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하며 예술제에서 입선, 특선을 했던 국중효 화가는 축제의 장으로 기억한다.

“미술부 30명이 나갔는데 2명 정도만 입선할 만큼 상을 받기가 어려웠다”며 “지금도 전통과 역사가 있는 호남예술제에서 수상을 한다는 것은 자부심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국 작가는 시대 트렌드와 연계된 방향성을 고심한다면 호남예술제는 100년, 200년의 역사를 써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도 부연했다.

나상옥 작가
우리 역사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입체감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조각 세계를 펼쳐온 나상옥 작가. 그에게도 호남예술제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고교 1학년 때 사직공원에서 열린 사생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동학100주년기념 승전탑’, ‘5·18광주민중항쟁 추모탑’, ‘광주학생운동기념탑’ 등은 역사와 현실을 이야기 조각의 창작방식으로 구현한 작품들로 꼽힌다.

나 작가는 “학창시절 호남예술제에서 상을 받는 것은 유명인사가 되는 것과 같았다”며 “수상 이력은 작가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자긍심이었다”고 언급했다.

송필용 작가는 꿈을 키워준 시간으로 호남예술제를 기억했다. 남도 대표 미술제인데다 학교에서도 뽑혀야 나가기 때문에, 입상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예향’이 있기까지 호남예술제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앞으로도 꿈나무들이 더 높은 꿈을 꿀 수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러 차례 예술제에 참가한 김해성도 호남예술제가 낳은 작가다. 그는 “당시 ‘수상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다’라고 인정받는 계기였다”며 “요즘은 학교가 성적에만 치우치다 보니 예체능 교육에 소홀한 점이 있는데 교육과 연계한 방식을 고민할 필요성도 있다”고 했다.

한편 한희원 작가는 뒤늦게 그림에 입문한 탓에 학창시절에는 예술제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후 심사위원을 많이 맡았다.

그는 호남예술제의 역사성과 지속성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

한 작가는 “예술의 꽃은 예술가다. 호남예술제는 지역 출신 작가들이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씨앗’을 뿌린 축제와 등용문의 장이었다 ”며 “70년이라는 세월은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다양한 가치를 내재한 축적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