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길’ 가고자 하는 학생들에 상상과 축제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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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길’ 가고자 하는 학생들에 상상과 축제의 무대”
호남예술제 70년 <6>호남예술제를 빛낸 예술가 - 황영성 화백
중학교 시절 예술제 참가 입상… 남도 현대화단 거목 성장
“호남예술제 고유 정체성과 시민들 소통으로 더욱 발전하길”
2025년 05월 27일(화) 20:10
가족의 의미와 범주를 확장한 작품 '가족'
“호남예술제는 예술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상상과 열정의 무대입니다. 당시 참가 경험은 예술의 길을 정진할 수 있게 한 버팀목과도 같았죠. 돌아보면 아득하지만 그 때의 감동과 기억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지 않나 싶습니다.”

60년 화업을 이어온 황영성 화백은 호남예술제가 배출한 대표 작가다. 중학교 시절 예술제에 참가해 입상했으며 후일 그는 남도 현대화단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또한 남도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예술가로 입지를 다졌다.

평생 캔버스를 마주하며 살아온 그에게 호남예술제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시간이었다. 사실 일평생 예술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남다른 결의와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아니 어쩌면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더욱이 50년대, 60년대 여건은 오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열악했다. 지난한 여정 속에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며 정진해온 원로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남도 예술, 현대 예술은 발전할 수 있었다.

얼마 전 황 화백을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예전만큼은 건강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특유의 친근함은 여전했다. 조근조근 건네는 나지막한 말에는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유 등이 담겨 있었다.

이전에도 인터뷰를 할 때면 황 화백은 호남예술제에 대한 단상이나 기억들을 풀어내곤 했다. 그때마다 열서너 살 소년 같은 천진한 표정의 얼굴에는 사람 좋은 미소가 어렸다. ‘예술가와 작품은 다르지 않다’는 말이 떠올려지는 모습이었다.

그는 호남예술제가 70년을 맞았다는 사실에 대해 “예술제는 학생들이나 청년들의 작품 발표회 무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며 “특히 호남예술제는 오늘의 광주를 예향(藝鄕)이라는 브랜드로 업그레이드시킨 가장 큰 단초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예술 꿈나무들의 발굴을 통해 광주 예술, 나아가 호남 예술을 견인해왔다”며 “미술 외에도 클래식, 문학,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꿈나무들에게 등용문 역할을 해준 것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황 화백의 그림은, 한 편의 동화처럼 신비롭고 순수한 이미지가 특징이다. 평범한 듯 비범함이 깃든 작품들은 일견 무질서해보여도 나름의 정교함을 지니고 있다.

그림을 하나의 주제로 요약한다면 ‘가족’이다. 그는 왜 생래적이며 원초적인 가족에 그토록 천착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친 그리움은 그림을 그리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길을 걷게 한 근기가 되었을 것이다.

황영성 화백에게 학생 때 참가했던 호남예술제의 기억은 예술 인생에 있어 중요한 자산이다. 지난 2023년 도립미술관 전시 당시 포즈를 취한 황 화백.
194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황 화백은 6·25 당시 고향을 떠나 광주에 정착했다. 그의 그림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후 조선대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5년 나주 영산포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이후 1967년 국선 입선을 계기로 이후 6차례 특선과 1973년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한다.

1991년에는 제25호 몬테카를로 국제회화제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1990년대 이후로는 국내를 넘어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93년 금호미술상을 비롯해 2004년 이인성 미술상, 2006년에는 황조근조훈장을 수상하는 등 대내외에서 작가적 역량을 평가받았다.

언급한 대로 황 화백의 그림을 관통하는,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주제는 ‘가족’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원초적인 고향을 못 잊어 했다. 지난 2023년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황영성 초대전: 우주 이야기’는 그의 예술인생을 집약한 전시였다. 회화를 비롯해 설치, 사진, 영상, 아카이브 등 모두 110여 점은 작가의 예술인생을 반추할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자신이 왜 ‘가족’ 이야기에 천착하는지를 소개하는 친필원고도 있었다. 작가의 깊은 내면에는 고향을 떠나오던 당시의 ‘소년’이 웅크리고 있었다. 소년은 인생 만년에 이르러서도, 하늘나라에 가야할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여전히 사무치게 고향을 그리워했다.

“나는 가족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의 작업의 주제도 가족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의 그림을 근 30여 년 그려온 것 같다. 처음에 가족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리움이었던 것 같다. 전쟁과 가난이 빼앗아간 나의 가족,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었다. 어린 시절 골목길 담 너머로 불그스름하게 따뜻하게 비추어오는 창문의 불빛 안에 그려지는 어느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내가 살았던 초가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 오손도손 살아가는 가족을 그렸다. 부부와 아이들, 소, 닭, 개들이 있고 초가지붕 너머로 뒷동산과 거기에 걸려 있는 초승달이 내 가족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황 작가가 천착했던 ‘가족’이라는 주제는 그 의미와 범주가 다변화된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그것은 수구초심(首丘初心)과 같은 의미일 게다. ‘머리를 구릉을 향해 두는 마음’이라는 뜻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가족의 형태가 다변화될지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가 오늘날 다시 추켜세워야 할 것은 다름아닌 ‘가족’의 의미와 사랑이다.

한편 황 화백은 마지막으로 호남예술제 미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애정어린 조언을 했다. 그는 “70년이라는 시간을, 한 번도 중단 없이 달려온 의지와 역사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며 “앞으로도 호남예술제가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의 트렌드와 시민들과의 소통을 토대로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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