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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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다면…
[리뷰] 광주 학동참사 4주기 추모극 ‘오늘까지만 살아있는 사람’
극단 밝은 밤, ‘비극의 기억’·‘추모의 의미’ 담은 무대 감동
희생자·유가족 위로…추모관 설립 2027년까지 공연 약속
2025년 06월 08일(일) 19:55
씨어터연바람에서 지난 6~8일 학동 참사 4주기 추모극 ‘오늘까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펼쳐졌다. 배우들이 열연하는 모습. <극단 밝은밤 제공>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잠시라도 떠나간 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니라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며 작별을 말할 수 있다면….

갑작스레 이별을 맞은 ‘광주 학동참사’ 유가족들의 간절한 마음이 무대를 적셨다.

2021년 6월 9일,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 건물이 무너지며 시내버스를 덮쳤다. 9명의 소중한 생명이 스러진 지 4년. 비극의 기억을 되새기고 다시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청년 예술가들의 연극으로 되살아났다.

극단밝은밤은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광주 동구 씨어터연바람에서 학동참사 4주기 추모극 ‘오늘까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무대에 올렸다.

이번 작품은 지난 2022년부터 매해 학동참사를 소재로 한 추모 연극을 진행하고 있는 극단밝은밤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작품을 연출한 임채빈씨는 “지난해까지는 ‘덩달아 무너진 세상’을 통해 엄숙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했다면, 올해부터는 4주년이 된 만큼 너무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기억과 추모의 의미를 최대한 담아내고자 했다”고 전했다.

“아무도 죽지 않는 하루는 없는 건가. 선택을 사람이 하는 것이라면, 책임 또한 사람이 지는 것.” 묵직한 울림을 품은 대사가 공연의 막을 올렸다. 작품의 배경은 이승과 저승 사이, ‘어중’이라 불리는 경계의 공간. 죽은 이들이 잠시 머무는 이 어중간한 곳에서 죽은 자들은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성철과 해찬 부녀는 왜 죽었는지, 마지막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무사히 저승으로 떠나기 위해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스스로 행복했던 기억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빠 성철과 딸 해찬이 ‘어중 기억 상담 네트워크’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극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초반부는 경쾌한 유머로 채워져 관객이 ‘추모극’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다. 조력자로 등장하는 어린아이 유훈, 탈북민 지선의 재치 넘치는 대사는 극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며 몰입을 돕는다. 관객들은 성철이 아내와의 연애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흐뭇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 장면은 ‘극중극’의 형식을 차용해 빠르고 유쾌하게 진행되며 신파로 흐를 수 있었던 회상을 유쾌하게 비틀어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안겼다.

‘오늘까지만 살아있는 사람’
‘감정 미스터리 판타지’라는 장르를 표방한 이번 작품은 단순한 사건 재현이나 고발극에 머무르지 않았다. 참사 그 자체보다 그 속에 놓여진 사람들과 그들의 감정에 주목했다. 죽음을 둘러싼 기억의 잔영을 감정적으로 직조해나가는 방식은 관객에게 신선한 울림을 전했다.

특히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부녀의 모습은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의 마음을 더욱 깊이 붙잡았다. 성철이 기적적으로 중환자실에서 깨어나 이승으로 돌아가게 되자, 해찬은 저승에 홀로 남게 된다. 그 순간 해찬이 흘리는 “고작 이딴 게 마지막 대화라니…”라는 말은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남긴 상실과 후회를 고스란히 환기했다.

‘오늘까지만 살아있는 사람’
성철과 해찬 부녀의 이야기는 실제 학동 참사 희생자들의 비극적인 사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참사 당시 시내버스 앞좌석에 앉았던 아버지는 가까스로 생존했지만, 뒤편에 앉아 있던 20대 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의식을 되찾은 아버지가 가장 먼저 “우리 딸은 괜찮냐”고 거듭 되물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작품은 부녀가 경계의 공간에서 다시 만나 제대로 이별하는 과정을 그려내며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남겨진 이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위로를 전했다.

한편 극단 밝은밤은 학동 참사 추모관이 건립되는 오는 2027년까지 공연을 이어가기로 약속했다.

황옥철 학동참사 유가족 대표는 “4년이란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은데도, 참사의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답답하고 안타깝다”며 “그런 가운데 지역의 청년들이 희생자와 유가족을 잊지 않고 매해 연극 무대를 이어가 주는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떠난 가족들과 진정한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이 이 비극이 인재(人災)였음을 잊지 않고 재발 방지와 책임 규명까지 함께 해주길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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