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조속한 명예회복을 - 최 효 섭 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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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외침을 받거나 주권을 빼앗겼을 때 목숨을 바쳐 지키고 되찾는 것은 국민의 도리이다. 수많은 선조들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목숨을 바쳐 광복을 했음에도 요즈음 몰지각한 일부 인사들이 노골적으로 친일행위에 앞장서는 것은 개탄할 일이다. 필자가 집안의 동학농민혁명 피해를 알게 된 것은 70년 전인 대여섯 살 때였다. 조부(최계식)께서 “너의 증조부(최선현)는 동학농민혁명 때 접주와 집강소장을 하셨고, 고막포 전투에서 패한 후 고향 해제에서 숨어 지내다 함께 참여한 형(최장현), 종제(사촌동생·최기현)와 함께 인근 주민의 밀고로 체포돼 함평을 거쳐서 나주에 있는 ‘일본군 순사청’까지 끌려가서 1894년 12월 28일(음력) 세 분이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갖고 기회를 노리다가 1894년 봉건제도 개혁과 탐관오리 척결을 위해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파병 요청이 없었음에도 6월 9일(음력 5월 6일)에 농민군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제물포(인천)로 상륙시켰다. 이때 상륙한 병력은 육전대 488명과 순사 20명이었다. 그리고 7월 23일(음력 6월 21일)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볼모로 잡고 조선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전국에서 300여만 명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하며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했다. 농민군은 서울로 향하던 중 신식 무기와 훈련된 일본군에 의해 공주 우금티 전투부터 장흥 석대들 전투까지 무자비게 진압을 당해 30여 만명이 살상을 당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발발 100주년이 되던 해인 2004년 3월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고 기념사업을 정부를 하여야 한다’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하였다. 또한 2019년에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여 매년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다 살상을 당한 수많은 농민군은 아직까지 단 한분도 국가독립유공자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명예회복 대상자 접수 결과 현재 참여자 3817명, 유가족 1만3394명이 등록됐을 뿐이다. 등록이 저조한 사유는 전사자 중에는 가족이 없거나 역적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참여한 사실을 숨기거나, 의병으로 활동하다 전사 또는 하와이 및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도가와 친일파들은 교육과 경제적인 여유를 누렸지만 살아남은 참여자와 후손들은 목숨을 부지하느라 가난하고 못 배워서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사망 또는 잊었기 때문이다. 법률로 ‘동학농민혁명’이라 정하고 있지만 교과서에는 아직도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하고 있어 개정이 필요하다.
동학농민군들의 명예 회복이 늦어지는 이유는 일본군이 자기 나라와 상관없는 다수의 농민군을 잔악하게 살상한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덮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을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 일어난 소규모 사건으로 축소 왜곡하는 뉴라이트나 친일파 학자들의 보이지 않는 방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정부정책 시행자도 특별법 제8조 사업을 소홀히 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여러 지역에서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지역 동학농민혁명역사 찾기와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특히 장흥지역 주민들은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전사한 무명 농민군의 묘소 두 곳(1000여 기)을 자발적으로 벌초하고 추모하고 있다.
또한 무안군 유족회와 기념사업회는 정부의 지원이 없어도 자체 사업계획을 수립한 후 무안군의 지원을 받아 위령제, 무안군 동학농민혁명사 발굴, 학술발표대회, 동학농민혁명정신 확산을 위한 중·고·대학생 연구발표회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무안이 서남부도호사 대접주인 배상옥(규인) 장군과 83명의 참여자를 발굴했으며 매년 12월 위령제를 모시고 있다. 나주 김씨 문중은 몽탄면 차뫼마을에 김응문·자문·덕구·영구, 해주 최씨 문중은 해제면 석산에 최장현·선현·기현의 실적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얼을 알리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 자주·평등 정신은 의병활동, 독립군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광화문 촛불집회 등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정부는 목숨을 바쳐 봉건제도 개혁과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다 순교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가족들의 애국애족 정신이 이어갈 수 있도록 조속히 명예회복과 국가독립유공자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다 살상을 당한 수많은 농민군은 아직까지 단 한분도 국가독립유공자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명예회복 대상자 접수 결과 현재 참여자 3817명, 유가족 1만3394명이 등록됐을 뿐이다. 등록이 저조한 사유는 전사자 중에는 가족이 없거나 역적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참여한 사실을 숨기거나, 의병으로 활동하다 전사 또는 하와이 및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도가와 친일파들은 교육과 경제적인 여유를 누렸지만 살아남은 참여자와 후손들은 목숨을 부지하느라 가난하고 못 배워서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사망 또는 잊었기 때문이다. 법률로 ‘동학농민혁명’이라 정하고 있지만 교과서에는 아직도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하고 있어 개정이 필요하다.
동학농민군들의 명예 회복이 늦어지는 이유는 일본군이 자기 나라와 상관없는 다수의 농민군을 잔악하게 살상한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덮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을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 일어난 소규모 사건으로 축소 왜곡하는 뉴라이트나 친일파 학자들의 보이지 않는 방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정부정책 시행자도 특별법 제8조 사업을 소홀히 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여러 지역에서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지역 동학농민혁명역사 찾기와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특히 장흥지역 주민들은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전사한 무명 농민군의 묘소 두 곳(1000여 기)을 자발적으로 벌초하고 추모하고 있다.
또한 무안군 유족회와 기념사업회는 정부의 지원이 없어도 자체 사업계획을 수립한 후 무안군의 지원을 받아 위령제, 무안군 동학농민혁명사 발굴, 학술발표대회, 동학농민혁명정신 확산을 위한 중·고·대학생 연구발표회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무안이 서남부도호사 대접주인 배상옥(규인) 장군과 83명의 참여자를 발굴했으며 매년 12월 위령제를 모시고 있다. 나주 김씨 문중은 몽탄면 차뫼마을에 김응문·자문·덕구·영구, 해주 최씨 문중은 해제면 석산에 최장현·선현·기현의 실적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얼을 알리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 자주·평등 정신은 의병활동, 독립군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광화문 촛불집회 등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정부는 목숨을 바쳐 봉건제도 개혁과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다 순교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가족들의 애국애족 정신이 이어갈 수 있도록 조속히 명예회복과 국가독립유공자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