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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초여름 생각나는 완도 모감주나무 군락
2024년 06월 19일(수) 22:00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계절이란 뚜렷이 나눠질 만한 게 아니지만, 식물 곁에 있다 보면 나만의 계절 구별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에게 여름이란 계절은 능소화와 자귀나무 그리고 모감주나무 꽃으로 시작된다. 이들 꽃이 피었을 때 나는 비로소 늦봄이 끝나고 초여름이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맘때면 도심의 도로 정체도 퍽 반갑다. 며칠 전 긴 강의가 끝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서 한숨을 쉬며 무심코 차창 밖 옆을 돌아보니 가지에 노란 꽃을 한가득 피운 모감주나무가 보였다. 차가 막히지 않았다면, 내가 멈춰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곳에 모감주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에서 모감주나무를 자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추위에 강하고 꽃을 피우는 기간이 길어 증식되어 관상수로서 도시에 심어지기 때문이다.

6월 초 노란 꽃을 풍성히 피울 때 우리는 비로소 이들의 존재를 깨닫는다. 물론 이맘때 꽃을 피우는 능소화나 자귀나무만큼 존재감이 강한 것 같진 않다. 이들의 국내 자생지 또한 안면도와 완도, 백령도, 포항 등등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모감주나무는 무환자나무과의 한 종으로, 수고 20미터 내외로 자라는 낙엽수다. 이들은 친척뻘의 무환자나무와 닮은 점이 많다. ‘모감주’라는 이름도 무환자나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무환자나무의 한자어인 ‘모관쥬’에서 ‘모감쥬’ 그리고 현재의 모감주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모감주나무는 이맘때 가지마다 노란 꽃송이가 한가득 달린다. 꽃은 가지 끝에 원뿔꽃차례로 빽빽하게 피고, 네 장의 꽃잎, 여덟 개의 수술 그리고 한 개의 암술로 이루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꽃이 피고 시간이 지날수록 꽃잎이 뒤로 젖혀진다.

도로에서 무심코 모감주나무 꽃을 만나는 이맘때가 되면 나는 완도의 모감주나무 군락을 떠올린다. 바닷가를 따라 약 1km가량 470여 주의 나무가 살고 있던 완도 대문리 군락. 이곳의 나무는 다른 지역의 군락에 비해 수령이 많은 반면 상태가 좋다. 가까이에 갈 수 없어 멀찍이 그들을 보았을 뿐이지만 해안선을 따라 줄지어 있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제멋대로 울창하게 자라난 가지들을 보면서 내가 늘 만나는, 바다가 아닌 도로를 따라 줄지어 사는 모감주나무를 떠올렸다.

모감주나무의 영어 이름은 골든 레인 트리이다. 황금비 나무. 노란 꽃이 져 땅에 떨어진 모습이 마치 황금비가 내린 것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모감주나무에는 노란 꽃이 만발하지만 곧 장마가 오면 나무 아래에 황금비가 내릴 것이다.

꽃이 진 후 맺는 열매는 꽈리 모양으로 가을이 지나며 갈색으로 익는다. 열매껍질이 종이처럼 얇아서 쉽게 부서지며 씨앗이 돌출된다. 씨앗은 매우 단단하고 만질수록 윤기가 나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 씨앗으로 염주를 만들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모감주나무를 염주 나무라고도 부른다.

이 씨앗에는 한 가지 쓰임이 더 있다. 천연 비누다.

몇 년 전 친구가 인도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에서 샀다며 내게 천연 비누를 주었다. 흰 주머니 안에 갈색의 동그란 씨앗 몇 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걸 소프넛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소프넛이 바로 ‘솝베리’ 무환자나무 씨앗이다.

무환자나무 열매에는 사포닌이라 하는 천연 계면활성제 성분이 들어 있어 이들 씨앗을 물에 비비면 거품이 나온다. 옛날부터 인도에서는 빨래를 할 때 무환자 나무껍질을 비누 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이 글의 주인공인 모감주나무 또한 사포닌 성분이 있어 비누로 쓸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쓰는 세제에 들어 있는 합성 계면활성제는 거품이 빨리 나고 극적인 효과를 주는 만큼 자연 분해 속도가 느려서 우리 피부에 자극적이지만, 모감주나무와 무환자나무에 든 사포닌은 피부에 닿아도 안전해서 앞으로 더욱 각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모감주의 ‘모감’은 한자로 닳아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가는 세상, 닳기 전에 버리기에 닳아 없어지는 현상을 잘 경험하지 못하는 시대에 모감주나무 이름이 유독 소중하게 느껴진다.

<식물세밀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