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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병사의 목숨 값
2024년 05월 29일(수) 21:30
제임스 하우스만(1918~1996)이라는 미국인이 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미 육군대위로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했는데, 광복군 출신보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우대해 국군이 친일세력의 피난처로 변질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경무대를 자주 드나들면서 대통령 이승만과도 가깝게 지냈다. 1952년 12월 23일 미군의 월튼 워커 장군은 지프차를 타고 가다 한국 육군 제6사단 2연대 수송부 정비대의 민간인 수리공 박경래가 운전하던 닷지 트럭과 충돌해 사망했다. 이승만은 한국군 소속의 운전수를 사형시키려 했는데 하우스만이 말리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보다 앞서 육군 소위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방첩부대장 김창룡의 지령으로 경교장을 찾아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민족의 지도자를 살해한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5년형으로 감형된 뒤 6·25전쟁 발발 직후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장교로 복귀했다. 예편 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면서 호의호식했다.

백범 암살을 지시한 방첩부대장 김창룡은 일제 때 만주 관동군 소속의 헌병보조원으로 일본군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항일조직 색출에 여러 번 공을 세워 헌병 오장(伍長)으로 승진했다. 일제 패망 후 고향인 함경도 영흥으로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사형 당할 뻔 했으나 탈출해 월남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처 1947년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정보국 정보장교로 과거 항일세력을 색출하던 특기를 발휘해 좌익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1949년 1월 김창룡을 방첩부대장으로 임명했고 그 직후 안두희가 백범을 암살했다. 김창룡은 6·25전쟁 때에는 군·검찰·경찰합동수사본부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아 숙청했다. ‘동해안 1군단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 사건’ 등을 일으켜 이승만에 비판적인 세력을 용공으로 몰아 제거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고문과 용공조작으로 악명 높던 김창룡은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저격당해 사망했다.

이승만은 적십자병원을 찾아 조문한 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하고 즉시 범인색출을 지시했다. 1967년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승만은 “김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했다”고 애도했고, 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이라고 칭송했다. 특무부대의 수사 끝에 허태영 대령 등이 범인으로 체포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허태영은 물론 그의 운전수 이유회까지 총살시켰다. 두 사람은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사형당했다(동아일보 1957년 9월 26일). 뿐만 아니라 현장에 함께 갔던 신초식과 송용고도 사형시켰다. 백범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는 사실상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지만 김창룡 저격사건은 주범과 공범은 물론 운전수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장수 오기(吳起)는 졸병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병사들의 종기를 직접 빨아서 낫게 했다. 그 병사의 어머니가 통곡하자 “장군이 직접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 어머니는 작년에 오기가 남편의 종기를 빨아주어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면서 “지금 또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그 아이가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라며 울었다. 이 때문에 ‘종기를 빨아주는 어짐’이란 뜻의 ‘연저지인’이라는 4자 성어가 생겼다. 오기는 냉혹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병사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여기는 처신으로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오기는 자신이 섬기던 위문후가 죽자 아들 무후를 섬겼는데, 하루는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하수가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무후에게 “군주께서 덕을 쌓지 않는다면 배 안의 사람들도 모두 적국 사람이 될 것”이라고 경계했고, 무후는 “좋은 말이오”라고 대답했다. 수해 복구 나갔다가 죽은 한 병사의 억울함을 자신의 억울함으로 여기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돌아설 것이라는 예견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