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이응노, 그리고 오지호 - 박진현 문화·예향국장,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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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이응노, 그리고 오지호 - 박진현 문화·예향국장, 선임기자
2023년 09월 12일(화) 22:30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1896-1948)을 기념하는 ‘나혜석거리’가 있다. 수원이 고향인 나혜석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세상을 뜬지 52년이 흐른 지난 2000년 조성한 곳이다. 한복을 입은 채 앉아 있는 형상과 양장 차림으로 화구세트를 들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이질적인 모습의 두 동상이 300m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을 깊게 들여다 보고 싶을 땐 수원시립미술관에 가면 된다. 수원의 관광1번지인 화성행궁 주변에 자리한 미술관의 ‘나혜석 기념관’에는 그가 남긴 20여 점의 작품 가운데 ‘자화상’(1928년 추정)과

도시 브랜드가 된 예술가

‘염노장’(1930년대) 등 5점이 전시돼 있다. 지난 2016년 미술관이 나혜석 탄생 120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별전에 유가족이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을 기증하면서 ‘나혜석 컬렉션’을 소장하게 됐다.

올해 대전광역시는 어느 해 보다 ‘핫한’ 여름을 보냈다. 지난 8월 ‘한여름 밤의 시간여행’을 모토로 개막한 ‘2023 대전 0시 축제’ 덕분이다. 대전의 원도심과 문화공간을 무대로 다양한 이벤트들이 펼쳐진 축제는 전국에서 110만여 명의 관광객을 끌어 들이는 성과를 거뒀다. 그중에서도 대전시립미술관과 이응노미술관은 예술도시의 매력을 발산하는 진원지였다. 특히 국내 최초로 뮤제오그라피(Museography·미술관 외관과 작품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를 도입한 이응노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대전의 랜드마크이기 때문이다. 0시 축제에 맞춰 기획한 ‘2023 미디어 파사드: 이응노, 하얀 밤 그리고 빛’은 미술관 외벽에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역동적인 작품을 투영해 환상적인 볼거리를 선사했다.

이응노미술관이 대전의 브랜드가 된 데에는 ‘고암 이응노’를 활용한 대전시의 공이 크다. 충남 홍성 출신인 고암(1904~1989)은 한지와 먹을 소재로 한 한국적 화법에 서양적 어법을 접목시켜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추구한 세계적인 작가다. 이같은 고암의 예술성을 지역의 문화자산으로 키우기 위해 홍성 출신이지만 탄생 100주년인 지난 2004년 54억원의 예산을 들여 미술관을 건립한 것이다.

대전 이응노미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에 자극받은 홍성군도 2011년 11월 2만㎡(6700평) 부지에 70억을 들여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을 건립했다. 흔적만 남아 있는 고향 생가터 옆에 유명건축가 조성룡씨의 설계로 건립된 이응노 기념관은 주변의 자연풍광을 끌어 들여 관람객들이 잠시 머물며 쉬어갈 수 있는 쉼터로 인기가 높다. 여기에 유족 등으로부터 기증받은 270여 점 등 고암의 작품과 유물 등 750여 점의 컬렉션을 보유해 대전 이응노 미술관과 ‘윈윈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유명한 예술가들은 한 도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예술인을 배출한 광주·전남의 인물 브랜드화는 유독 미흡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한국서양화단의 선구자 고 오지호(1905~1982) 화백에 대한 예우는 안타깝기만 하다. 광주에서 오 화백의 예술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곳은 번듯한 미술관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간 기거했던 지산동의 초가(광주시 기념물 제6호)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화순에도 생가터인 동복에 건립된 ‘오지호 기념관’이 있지만 소묘 1점 이외에는 모두 복제품이다. 이렇다 보니 하루 평균 1명이 방문(지난해 기준)하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거장의 예술세계를 접할 수 있는 진품이 없는 기념관에 방문객이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해는 오 화백이 세상을 떠난지 40주년이 된 뜻깊은 해였지만 변변한 추모행사 조차 열리지 않았다.



‘도립 오지호미술관’ 어떤가

그런 점에서 오지호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를 담은 ‘미술관 건립’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화두가 됐다.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백영수 등 한국 화단에 큰 획을 그은 대가들의 출생지들이 위상에 걸맞은 기념관이나 미술관을 건립해 도시의 문화자산으로 키워가고 있는 게 이를 방증한다.

그래서 말인데, 오지호 기념관을 전남도와 화순군이 머리를 맞대고 ‘도립 오지호 미술관’으로 건립하는 건 어떨까. 현재 광주 지산동에 있는 초가는 지방문화재로 등록돼 ‘제약’이 있는 데다 화순 동복 생가 옆의 기념관은 접근성에서 떨어져 미술관 부지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광주와 전남도, 화순이 공동으로 최적의 장소를 찾아 ‘오지호 미술관’을 짓는다면 지산동 초가~화순 생가로 이어지는 일명 ‘오지호 투어’는 물론 광주비엔날레, 화순의 관광명소, 광양의 도립미술관 등과 엮어 막대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미술관에 채워 넣을 컬렉션은 유가족이나 뜻있는 컬렉터들의 기증을 유도하는 등 지혜를 모으면 된다.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가을의 초입인 9월, 광주·전남은 디자인비엔날레,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등 그 어느 때보다 초대형 미술축제의 열기로 뜨겁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상을 떠난지 40년이 흐른 지금도 ‘지상의 방한칸’을 구하지 못해 떠돌고 있는 거장이 있다. 예향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에 숨겨진, 우리의 민낯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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