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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황성호 신부, 광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2년 11월 18일(금) 00:30
한나 아렌트는 전범자이자 600만 유대인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보고 느낀 점을 서술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의 저자다.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상사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것이고 어느 누구도 실제로 죽이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아이히만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심의 가책도 전혀 느끼지 않았으며 그저 복종만 했다고 주장했다.

한 인간의 모습이 어찌 이토록 참혹하고 악마적인지 모르겠다. 거대 담론을 논하고 싶지 않다. 그저 왜 인간이 사람의 생명을 두고 이렇게까지 잔인한지 궁금할 뿐이다. 자신은 명령에 복종했고, 또 법을 지켰는데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를 오히려 되묻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면 누구나 아이히만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는 선봉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아이히만과 똑같은 상황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최근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원로라고 할 수 있는 한 정치인의 말이 떠오른다. 정치 지도자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면서 공사·경중·선후·완급의 네 가지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 아는 것처럼, 공사(公私)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공적 영역으로서 모두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경중(輕重)은 잘 가려야 한다.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는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선후(先後)도 경중과 함께 잘 가려야 하는데,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 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느림과 빠름의 완급(緩急) 조절도 필요하다.

이 네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분열과 혼란을 가중시키고 무거운 짐만 지울 뿐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니, 모든 일이 비밀스럽고 무질서해 보일 뿐이다. 쉽게 말해 내 것과 우리의 것을 구분하지 못해 자기 마음대로 정치하게 될 소지가 크다. 경중도 그렇다. 당연히 공사 구분이 안되니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할 뿐이다. 선후도 만찬가지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다면 먼저 할 것이고, 이익이 없다면 먼저 해야 할 일도 나중에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인가? 만일에 생명을 다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경중과 선후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영적인 식별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영적인 식별은 곧 모든 것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고, 또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투신했을 때 가능하다. 쉽게 말해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어야 가능한 것이 영적인 식별의 첫 단계라고 본다. 영적인 식별이란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랬다. 하느님이신 분이 하느님과 같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죄를 제외하고 인간과 똑같이 되신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인 식별이 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역설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기준인 공사·경중·선후·완급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행동 결과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철저한 탐욕의 노예 근성이라고 본다. 잘못된 정치나 학살에 대한 이유를 법질서의 유무로 따졌을 때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이 승리하여, 보다 더 중요한 생명이 탐욕을 만족시키는 쾌락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