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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등불을 들고-고성혁 시인
2022년 09월 07일(수) 02:00
여야를 떠나 좋은 정치인이 몇 없습니다. 그저 제 생각일 뿐이라고 치부하지만 마음속에 존경할 만한 정치인이 없다는 건 고통스런 일입니다. 감성과 이성이 조화로운 사람, 정의의 격정이 있는 사람, 약한 사람에게 한없이 약한 사람. 어디 그런 사람 없을까요?

기회는 천사의 얼굴만으로 오지 않는다. 김대중의 말입니다. 그는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의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참혹하고 억울한 세월이었음에도 그곳에서 600권의 책을 읽고 시대를 준비했으니 그의 말은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5·17 내란음모죄로 감옥에 있을 때 대통령만 빼고 뭐든지 말하라는 신군부의 유혹을 ‘광주 사람들’과 함께 죽겠다며 거부한 사람이지요. 재판정에서 사형의 ‘사’자를 말하면 입이 찢어지고, 무기징역의 ‘무’자를 말하면 입이 튀어나오니 재판장의 입 모양만 보고 있었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울었습니다. 생사를 알 수 없던 아들의 편지를 차마 읽지 못하고 취침 시간에야 이불 속에서 읽고 울었다는 인간적인 그이가 그립습니다. 그런 모진 고통을 겪었으니 빨갱이로, 지역주의자로 평생의 족쇄를 씌운 상대편 사람을 용서한 것일까요. “저들이 틀렸다고 우리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통섭은 지금의 정치판에서 가장 절실한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앞장 서 IMF를 극복하고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문화 융성의 대원칙을 제시하지 않았을까요? 지난 대선에서 그가 왜 그토록 호명됐는지 그 까닭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관용과 원칙의 준비된 지도자, 그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1988년 5공 비리 국정감사 청문회에서 노무현은 신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때껏 정치판에서 그와 같은 겸손과 진정성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정주영으로부터 그는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줬다”라는 고백을 받아 냈지요. 당 지도부의 뜻을 어기고 전두환에게 명패를 내던진 그의 격정적 장면은 내 평생 가장 귀한 기억입니다. ‘종로’라는 쉬운 선거구를 마다하고 뻔히 떨어질 줄 알면서 부산으로 간 ‘바보 노무현’. 그런 원칙, 순도 100%의 진정성, 헌신과 희생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보 노무현’과 같은 사람으로 정치판을 채울 수 있다면 우리 국민의 삶에도 꽃비가 내릴 것입니다. 나는 그가 가고 없는 부엉이 바위에 올라 그가 운명이라고 읊조리고 있는 마지막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의 고독이 너무나 사무쳐 흐느껴 울었지요. 그를 조롱거리로, 사지로 내몬 이인규는 아직도 미국에 있습니까?

또 한 사람 그리운 이가 있습니다. 노회찬입니다. 그가 남긴 명연설 ‘6411번을 아십니까’를 다시 읽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한 달에 85만 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 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그가 가진 건 십 년 넘은 양복 두 벌과 낡디낡은 구두 한 켤레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국회에서 신문 배달비를 올려준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고 합니다. 빈자의 진정한 이웃이었던 노회찬. 2018년 7월 27일 새벽 그를 보내며 나는 ‘새벽 첫 버스, 6411호’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리 시대의 불꽃 용접공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라고 왜 허물이 없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그리운 건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념을 지켰으며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반성이 없는 우리 정치가 마침내 고사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민주당을 견인했던 호남 정치가 완전히 지리멸렬했습니다. 우리 정치를 살려낼 눈물과 신념, 원칙을 가진 정치인은 어디 있습니까? 시커멓게 타버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정치판을 갈아엎을 사람 어디 없을까요? 한낮에 디오네게스의 등불을 들고 그이를 찾고 찾습니다. 이분들처럼 끝내 존경하고 그리워 할 우리 일꾼, 어디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