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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의 문학, ‘수필의 시’를 맞이하자-오덕렬 창작수필 작가·전 광주고 교장
2022년 08월 10일(수) 00:30
내가 ‘창작수필을 평하다’라는 수필 평론집을 냈을 때다. 수필가이면서 출판사를 경영하는 한 분이 “왜, 꼭 창작수필을 평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 저 분이 ‘창작’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구나!’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수필은 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냥’이란 말은 창작수필이 아닌 일반 수필이란 뜻이다. 일반 수필엔 체계적인 수필론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엇을 기준으로 할 잣대가 없어 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필 교실에서 흔히 말하는 ‘합평(合評)’이라는 말은 문학적 의미로는 틀린 말이다.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 수필론도 없는 수필을 평한다? 여기서는 겨우 문장을 가지고, 이런 표현은 좋고, 저런 표현은 조금 더 다듬어야 하고…. 이런 감상평이 고작일 것이다. 결국 문장 다듬기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학인 수필도 진화한다. 수필은 작가가 곧 화자(話者)다. 그래서 수필은 ‘나’는 이라고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수필의 원조인 몽테뉴의 ‘에세(essais)’는 ‘수상록’으로 번역됐지만 ‘나’의 존재를 제대로 알기 위한 몽테뉴의 치열한 시도였던 것이다. 에세는 곧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식 이름 에세이가 되었고, 2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찰스 램의 작품 ‘꿈속의 아이들’에 와서 화자가 3인칭으로 바뀐다. 화자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는 진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수필도 문학 대열에 올라섰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램은 에세이(수필)의 완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수필은 ‘변방문학’이니 ‘여기의 문학’이니, 심지어 ‘수필도 문학이냐’는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수필 화자가 3인칭으로 변하면서 시나 소설처럼 진정한 순문학의 길에 들어서면서 문학 대접을 받게 되었다. 순문학이란 ‘상상’과 ‘허구’가 도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순문학 수필은 갑오개혁 무렵에 서양 문예사조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한 줄기가 ‘창작적 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서 창작·창작적인 수필, 최남선의 ‘가을’(‘청춘’ 11월호)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수필의 창작적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작수필인 ‘수필의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된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려면 그 장르의 기본 소양은 이해해야 하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

한국문협 수필분과 회원 3600여 명 중에서 창작수필의 핵인 ‘상상’과 ‘허구’를 제대로 이해하는 수가 얼마나 될까? 모든 장르의 문학은 작가와 독자와의 대화다. 대화는 서로 수준이 맞아야 한다. 지금은 그냥 수필시대가 아니다. 창작수필 시대요, ‘수필의 시’가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시대다.

지금은 농경사회 농사법으로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 이앙기로 모를 내고, 콤바인으로 벼를 베면서 탈곡까지 한다. 농사법도 시대에 따라 이렇게 변한 것이다. 수필도 창작적 진화를 거듭하여 얼마 안 있어 창작수필인 ‘수필의 시’가 모든 장르의 한가운데서 왕자 자리에 앉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 AI시대에 소설은 너무 길고, 시는 난해시로 전락했다. 그런 사이에 시를 품은 수필인 ‘수필의시’는 잃어버린 이야기와 버림받은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살려 쓰고 있다.

현명한 수필 독자들이시여! 독자들은 문학의 지각 변동을 감지하고, 미래 문학인 수필로, 창작수필로 쏠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변혁은 결코 중심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변방에서 개혁의 기운은 솟는다. 주위에 시·소설·희곡·문학평론은 물론 창작적인 변화를 용인하는 기타 시문을 모두 포용하는 AI시대의 문학, ‘수필의 시’를 맞이하자. 수필 독자여, 가슴 뛰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