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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고려인 내리사랑
박 용 수 고려인동행위원장 한신대 초빙교수·정치학박사
2020년 11월 16일(월) 23:40
지난 10월18일 제8회 고려인의 날. 코로나로 인해 흥겨운 마을 축제는 취소됐지만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고려인 동포들이 100년 전 오방 최흥종 목사가 자신들에게 베푼 사랑을 기억하고, 손자 최협 전 전남대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새긴 추모패를 드린 것이다. 고려인들은 100년 전, 최흥종 목사가 광주에서 연해주까지 두 차례나 달려와 자신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항일 독립투쟁에 나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갚겠다고 다짐했다.

오방은 1922년 선교사로 연해주 고려인 사회에 들어가 선교 활동과 항일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고 추방됐다. 그는 핍박과 환란에 굴하지 않고, 1927년 또다시 연해주에 갔다가 4개월 만에 또 추방됐다. 상상을 뛰어 넘는 민족과 동포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광주의 고려인에 대한 첫사랑의 기록이다.

오방은 광주 최초의 장로요 목사였다. 광주YMCA 설립자로 한센인과 결핵환자 구호 활동과 함께 광주3·1운동과 노동운동 및 청년운동을 이끈 ‘광주 정신’의 상징적 인물이다. 인도의 간디나 바울 사도에 비견되며 ‘인류의 스승’으로 평가받을 정도다. 1966년 별세하자 오방의 장례식은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됐다. 당시 수많은 한센인, 부랑아, 결핵 환자들이 운구 행렬을 뒤 따르며 “우리 아버지가 떠났다”고 절규했다고 한다. 오방은 연해주 고려인 역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려야 할 형제로 여겼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될 즈음 광주의 시선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광주의 고려인에 대한 두 번째 사랑이다. 광주일보가 고려인들의 한 맺힌 강제 이주사를 소개하면서, 고려인 모국어 찾아 주기 모금 운동을 벌여 우즈베크와 카자흐스탄 등 다섯 곳에 한글학교를 세웠다. 당시 전남대와 조선대 졸업생 등 여덟 명이 청운의 꿈을 안고 교사로 파송됐다. 김병학 고려인 역사 연구가도 그중 한 사람이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한글학교 교사로 갔다가 나중에 학교가 문을 닫자 고려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25년간 수집한 고려인 역사 유물 1만 2천여 점을 갖고 들어와 고려인 마을에 기증했다. 그중 고려인 기록물 23권은 지난1월 국가기록원의 국가 지정 기록물 제13호로 처음 등재됐다. 귀중한 고려인 역사 유물은 오는 12월 개관하는 광주 월곡동 고려인 역사유물전시관에 전시된다. 카자흐스탄 한글학교 교사 김병학이 가져온 뜻밖의 선물이다.

2001년은 고려인 마을 역사의 기원이다. 그해 우즈베크 고려인 3세 신조야 대표 가족 3명이 광주 월곡동에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다. 이후 고려인들의 광주행이 줄을 잇더니 어느새 7천 명을 넘어섰다. “광주가 인심 좋고, 살기 좋다”, “광주 이천영 목사에게 가면 무엇이든 도와준다” 그런 입소문이 중앙아시아에 퍼진 덕이다. 무엇보다 월곡동 선주민들이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나 생활의 불편을 이겨 내고, 같은 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고려인마을에는 어린이집, 아동센터, 청소년문화센터, 새날학교, 고려인진료소, 미디어센터, 고려FM, 고려인 인문연구소 등 필요한 시설과 기관이 속속 들어섰다. 광주 시민들은 법률 상담과 의료 봉사, 고려FM과 고려인 콘텐츠를 통해 고려인들과 동행하고 있다.

광주 월곡동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광주 속 지구촌이다. 통섭과 융합의 플랫폼이요, 생방송 삶의 현장이다. 따라서 다양한 스토리와 콘텐츠가 축적되고 있는 중이다. 고려인마을이 광활한 유라시아와 가교 역할을 감당하면서, 광주가 한층 커지고 있다. 역사는 보다 깊어지고 문화는 보다 풍성해졌다. 고려인이 이 땅에 온 것은 광주의 축복이다. 1백 년 전 오방 최흥종 목사로부터 시작된 내리사랑의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