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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두 경찰관의 결단

2020년 10월 19일(월) 00:00
이 진 택 제 2사회부 부국장
10월 21일은 72돌을 맞는 경찰의 날이다. 기념하고 축하할 날이지만, 수사권 조정과 자치경찰 도입이라는 큰 명제 앞에 경찰 내부는 그리 평온하지 만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어떠한 극한의 현실일 지라도 경찰의 제1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다.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례사람들의 생명과 천년 역사의 문화유적을 지켜낸 두 경찰관이 있어 오늘에도 회자되고 있다.

이 두명의 경찰관은 전시임에도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념에 따라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내린 결단이었다.

70년 전 한국전쟁 발발 한달 뒤인 1950년 7월 24일. 안종삼(당시 47세) 구례경찰서장은 상부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았다. 유치장에 갇혀있는 좌익과 북한군에 부역한 혐의의 보도연맹 관계자 480여명을 모두 사살하고 후퇴하라는 지시였다. 안 서장은 고심 끝에 이들을 살려주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들을 살려주게 되면 돌아올 보복이 두려워 반대하는 부하들이 많았다. 특히 전시의 명령 불복종은 사형을 뜻하기도 했다.

안 서장은 480여명의 보도연맹 관계자를 경찰서 뒷마당에 모이게 한 다음 “여러분! 난 지금 내목숨과 맞바꿔야 할 중대한 결의를 해야 할 순간에 서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이 조치로 내가 반역자로 몰려 죽을 지도 모르지만, 혹시 내가 죽으면 나의 혼이 여기있는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사람이 되어 주십시요. 선량한 대한민국의 백성으로 말입니다”라고 말한 뒤 모두를 석방했다.

당시 구례경찰이 파악한 불순분자는 5000여명으로, 이 중 800여명은 뚜렷하게 좌익활동이 인정됐다. 이 중에서도 극렬분자 480여명을 다시 선별해 유치장에 가뒀기에 이들을 풀어준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부하 경찰관들은 불안해 했다. 그러나 안 서장은 모두를 살렸다.

이 때문인지 이후 인민군이 구례를 점령했을 때 경찰 가족에 대한 보복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안 서장은 이듬해 1월, 다시 구례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군민들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지금 구례경찰서 앞 마당에는 74세로 생을 마친 안종삼 서장의 동상이 서 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지금으로부터 69년 전, 지리산 화엄사를 초토화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차일혁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의 말이다. 당시 차 대장의 나이는 31세였다. 차 대장은 1951년 5월 한국전쟁 당시 대원들을 이끌고 남부군 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만한 절과 암자를 모두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자, 고심 끝에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의 문짝만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리고 상부에는 문짝만 태워도 “빨치산의 은신처를 없앨수 있다”고 보고해 천년사찰 화엄사를 지켜냈다.

그는 작전 중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의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찰관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가 3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50년만의 일이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지리산에서 사살한 후 섬진강가에서 장례식을 치룬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구례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 50여m 오르면, 바로 오른편에 차일혁 경무관의 공덕비가 있어 지금까지도 화엄사를 지키고 있다.

두 경찰관의 결단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나’였다면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lit@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