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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금 태종, 요·북송 멸망시킨 금나라 2대 황제

2020년 07월 14일(화) 00:00
<초당대총장>
금 태종(1075~1135)의 이름은 완안성(完顔晟)으로 금나라의 2대 황제(재위 1123~1135)다. 여진족 이름은 오걸매로 1대 황제 아골타의 동복 동생으로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금 왕조의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헤이룽장성 하얼빈 주변의 아시허 지역에 사는 생여진의 일족인 완안부 족장 핵리발의 4남으로 태어났다. 1113년 형 아골타가 족장이 되자 최측근으로 국정 운영에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형 태조가 1123년 9월 수도인 상경 회령부로 귀환 도중에 병사하자 뒤를 이었다.

태조는 1121년 북송과 비밀리에 해상(海上)의 맹(盟)을 맺었다. 북송이 매년 세폐를 보내고 북송과 금이 요를 공격할 때 금이 장성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왕조 멸망의 위기에 몰린 요의 천조제는 북송과 밀서를 교환하고 있었다. 1125년 금군에게 체포되었다. 북송의 배신에 격분한 금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북송을 정벌하기 위해 남하했다. 연경을 지키던 북송의 곽약사 군대는 금군에 투항했다.

발해 출신의 곽약사는 금군의 선두로서 수도 개봉 공격에 앞장섰다. 겁에 질린 북송의 휘종은 퇴위하고 장남인 조환을 세우니 마지막 황제인 흠종이다. 1126년 정월 황하를 건너 개봉으로 들이닥쳤다. 휘종은 박주를 거쳐 강남의 진강으로 도망쳤다. 재상 채경, 환관 동관 등 조정의 핵심부가 모두 탈주했다. 개봉은 이강 등 주전파와 강화파의 싸움으로 금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양측은 강화에 도달했는데 주전파인 이강의 파면과 중산, 태원, 하간 3진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태종은 금군을 북쪽으로 철수시켰다. 개봉에서 재차 주전론이 득세했다. 태종은 북송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동년 11월 재차 황하를 넘어 개봉을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수천 명의 관리, 기술자, 예술가를 금으로 압송하였다. 1127년 북송은 멸망하였다. 역사상 유명한 정강의 변이다.

휘종의 9남인 조왕 조구는 강남으로 내려가 남송 왕조를 세우고 초대 황제인 고종에 즉위했다. 금과 남송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금 태종은 장강을 넘어 남침했다. 고종은 2년간의 피난 생활을 거쳐 1132년 남송의 수도 임안으로 돌아왔다. 금군은 총사령관 종필의 지휘 하에 여러 차례 남침했으나 악비, 장준, 한세충 등 남송 장군의 분투로 정벌에 실패했다. 특히 명주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1134년 금군이 재차 남침했다. 회남 전투에서 한세충, 유광세, 악비, 장준 등이 분전해 전선을 지킬 수 있었다. 1130년 금에 인질로 잡혀있던 진회가 남송으로 돌아와 금과 남송 간 화의가 시작되었다. 진회는 1131년 범종윤을 대신해 재상이 되자 실익 없는 금과의 싸움을 종식하고 화해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데 진력했다. 그 과정에서 대금 강경파인 악비가 처형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진회는 대대로 나라를 팔아먹은 한간(漢奸)으로 매도되었다. 결국 태종 다음 대인 금 희종 때 양국은 강화조약을 맺었다. 금 태종의 또 다른 업적은 라이벌 요를 완전히 멸망시켜 만주, 내몽고, 화북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금의 판도를 구축한 것이다. 1101년에 즉위한 요의 천조제는 정사보다는 유흥에 관심 많은 문제적 인물이었다. 금 태조는 1115년 9월 길림의 황룡부를 공격해 점령했다. 멀지않은 곳에 거란인의 젖줄인 황하가 흐르고 있었다. 천조제는 70만 대군을 조직해 정벌에 나섰다. 감군 야율장노 무리가 전선을 빠져나와 야율순을 새 황제로 옹립하려 하였다. 부득이 천조제는 서쪽으로 돌아가 반란을 평정했다. 이후 천조제는 부인과 아들을 죽이는 참극을 연출했다. 총명한 문비 소슬슬을 자살하도록 강요하고 아들 진왕도 내쳤다. 1125년 정월 결국 금군에 붙잡혔고 요는 멸망했다. 이로써 209년의 왕조가 사라졌다.

금 태종은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지만 권력 기반은 확고하지 못했다. 아들인 종반에게 재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여진 원로들의 완강한 반대로 부자 승계는 무위로 끝났다. 결국 형 태조의 장손인 희종 완안단에게 1135년 양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