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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진회, 남송 초 재상…금나라와 화의 주도

2020년 06월 30일(화) 00:00
<초당대총장>
진회(秦檜, 1090~1155)의 자는 회지(會之)로 강녕 출신이다. 남송 초 재상으로 금나라와의 화의를 주도했다. 명장 악비를 죽이고 금나라에 사대한 간신으로 평가된다.

북송 휘종 정화 5년(1115) 진사 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나갔다. 흠종때 좌사간과 어사중승을 역임했다. 금나라가 남침한 정강지변(1127)으로 북송이 멸망했다. 진회는 휘종, 흠종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다. 금나라가 장방창을 황제로 하는 괴뢰 정권을 개봉에 수립하려는 계획에 반대 상소를 올려 끌려가게 된 것이다. 1130년 진회가 갑자기 남송 조정에 나타났다. 금의 실력자 달라를 수행하던 중 도망쳤다고 주장하지만 양국의 화의를 목적으로 풀어준 것이다. 그는 포로 생활 중 화의파로 표변했다. 남송의 군사력으로는 신흥 강국 금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소흥 원년(1131) 범종윤을 대신해 남송의 재상이 되었다. 남송의 고종은 부친과 형이 북에 억류되어 있어 정통성에 적지 않은 도전이 있었다.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금과의 화평은 불가피했고 진회는 이를 실현할 최적의 인물이었다.

다음해 탄핵을 받아 물러났지만 1138년 재상에 복직한 후 1155년 죽을때까지 18년간 재상 직위에 있었다. 1134년 금이 재차 남침하자 남송은 장준, 한세충, 유광세, 악비의 분투에 힘입어 금군을 막아냈다. 군부의 득세로 군의 통제가 금과 화해를 추구하는 고종과 진회에게는 뜨거운 감자였다. 금으로부터 부친 휘종이 죽고 모친 위씨는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화평 교섭에 박차를 가했다. 1139년 금과의 강화에 성공했다.

금이 하남과 섬서를 반환하는 대신 남송은 금의 신하로 예를 다하고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보내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금 내부의 정쟁으로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협상을 주도한 달라 일파가 처형되고 종간, 종필 세력이 집권했다. 1140년 재차 금군이 남침했으나 네 명장의 활약으로 진격을 저지했다. 진회는 이들의 병권을 박탈하지 않으면 금과 화평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장군들에게 추밀원 관직을 주는 대신 병권을 회수했다. 한세충과 장준을 추밀사에 악비를 추밀부사에 임명했다. 장준은 기꺼이 진회와 뜻을 같이 했다.

대금 강경론을 주장하는 악비가 골치덩어리였다. 결국 악비의 부장인 왕귀와 왕준을 교사해 역모를 조작했다.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악비와 그의 아들 악운, 부장 장헌을 주살했다. 한세충이 경위를 묻자 “악비의 아들이 장헌에게 보낸 편지가 아직 확보되지 않았지만 그 일 자체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오”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1142년 2월 양국은 2차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회수를 경계로 북은 금이 남은 남송이 다스린다. 남송은 신하의 예를 다하고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보낸다는 강화조건이었다. 회수를 국경으로 삼는 바람에 남송이 화북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해 1차 조약보다 훨씬 불리했지만 남송 정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강화의 결과로 금은 휘종의 유해와 위씨를 돌려보냈다.

이로써 몽골족이 남하할 때까지 약 100년간 화평이 이루어졌다. 남송의 수도 임안은 번성했고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진회의 화평주의는 본인의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군사적으로 월등한 금과의 싸움은 남송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었다.

진회의 계책이 남송 정권의 안정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충신 악비를 죽이고 오랑캐와 타협한 진회의 처신은 후대의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역사적 단죄를 두려워 한 진회는 아들 진희와 손자 진견을 사관으로 임명해 비판적인 문서나 사료가 나오는 것을 막았다. 남송의 대학자 주희는 명분주의와 한족 민족주의를 강력히 주장했고 학계나 문화계의 평가는 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진회의 이미지는 한족을 배반한 한간(漢奸)으로 굳어졌다. 저장성 항주에 있는 악비묘 앞에는 쇠사슬에 묶인채 무릎을 꿇고 있는 진회 부부의 철상이 놓여 있다. 악비묘를 찾는 사람들마다 침을 뱉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