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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악비, 남송초 명장…반란죄 누명에 희생
2020년 06월 09일(화) 00:00
악비(岳飛, 1103~1141)의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 탕음현 사람이다. 남송초 금나라에 저항한 명장이다.

가난한 농가 출신이다. 부친 악화는 어렸을 때 홍수에 익사하고 모친과 함께 하북성에 정착했다. 1122년 군에 들어갔다. 무용이 출중해 종택의 참모가 되었다. 금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 전과를 거두어 빨리 승진했다. 소년 시절 취침전에 읽은 손자병법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남송 고종 건염 원년(1127) 수도를 강남으로 옮기는 방안에 반대해 관직을 잃었다. 이후 종택을 이은 두충의 참모가 되어 장강을 도하하는 금군을 막았다. 지휘관들이 도주하자 비장하게 말하기를 “우리는 국가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죽음이 있을 뿐 다른 선택은 없다. 이 문을 나서서 도망가는 자는 모두 참한다.”

금의 장군 종필이 임안을 공격하자 여섯 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이후 금군은 “악비 장군의 군대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다투어 투항했다. 1130년 금군이 상주에 침공하자 4번에 걸쳐 모두 이겼다. 청수정 싸움에서도 금군을 대파해 금군의 시체가 15리에 걸쳐 널려 있었다. 종필이 건강을 점령하자 우두산에서 내려와 금군을 격파해 건강을 회복했다. 악비는 상소문을 올려 청하기를 “건강은 국가의 요충지입니다. 마땅히 군대를 엄선해 굳게 지켜야 합니다.”

1131년 이성이 난을 일으켰다. 고종은 장준이 악비와 함께 토벌토록 명했다. 악비는 붉은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岳’이란 글자를 써넣었다. 적장 마진을 대파했지만 이성은 도주했다. 다음해 조성이 난을 일으켜 도주와 하주를 침략하자 악비에게 명해 토벌토록 하였다. 1133년 고종은 그를 불러 금대(金帶)를 착용토록 하고 ‘한결같이 충성스러운 악비(精忠岳飛)’라고 쓴 깃발을 하사했다. 또한 앞으로 군대를 출동시킬 때마다 반드시 이 깃발을 앞세우도록 명하였다. 1134년 청원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135년 형호양양제치사로 임명되어 양태 무리를 토벌하였다.

악비는 군대를 동원할 때마다 군량미가 모자라 애를 먹었다. 경서와 호북 일대의 반란이 편정되자 백성으로 하여금 영전(營田)을 시작하였다. 백성들에게 소와 종자를 지급하고 식량을 지원했다. 이로써 군량미 걱정을 크게 덜게 되었다.

금이 남송과 맺은 맹약을 어기고 소흥 10년(1140) 종필의 지휘하에 대거 남침하였다. 악비는 금군과 조주, 완정현에서 크게 승리했다. 연이은 싸움에서 이겨 진주, 정주를 회복하고 하남부 남성군을 수복하였다. 여세를 몰아 중원을 되찾자는 북벌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재상 진회는 금과의 화의를 위해 고종에게 권해 철군을 명령했다.

악비가 선무사로 승진하자 한세충과 장준이 이를 시기하였다.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겸양의 자세를 보였지만 답신이 없었다. 특히 장준과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재상 진회, 급사중 범동은 대금 화의파였다. 여러 장군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 통제가 어렵다고 보고 장군들에게 추밀원의 관직을 주는 대신 병권을 회수토록 하였다. 장준과 한세충은 추밀사에 악비는 추밀부사에 임명되었다. 장준은 악비의 부장인 왕귀와 왕준을 구슬러 “악비의 부장인 장헌이 음모를 꾸며 악비가 다시 군사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한다”고 무고하도록 했다. 장준은 악비 부자를 체포해 투옥하였다. 진회는 방의선을 사주해 “악비 부자가 장헌 및 장귀에게 서신을 보내 허위로 적들이 침공한다고 경고토록 해 조정을 움직이려 했다”고 죄목을 꾸몄다.

악비는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회는 여러 조작된 증거로 악비는 사형에 처하고 장헌과 악비 아들 악운은 저잣거리에서 주살하였다. 재산은 몰수되었다. 남은 가족은 유배되었다. 한세충이 진회에게 사정을 묻자 “악비의 아들이 장헌에게 보낸 서신이 아직 확보되지 않았으나 그일 자체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오”. 한세충이 말하기를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말로 어찌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소” 악비가 죽자 천하가 안타까워 했다. 효종때 무목의 시호가 내려졌고 영종때 악왕(鄂王)에 추봉되었다.